권력이 망나니 칼춤을 추는 시대에 우리 국회 벽의 문구?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최보식의언론=이병태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며칠 전 국회에 행사 차 들렸는데 의사당 건물 벽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글이 붙어 있다.
민주주의 근본 원리인 '국민주권주의'의 선언이다.
지금 중동의 전쟁은 "권력이 신으로 부터 나온다"는 신정일치 권력과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다"라는 왕과 같은 대통령의 고장난 대의제 권력간 충돌이다. 이 무력화한 권력간 충돌에 주인인 국민은 없고 종들만 존재한다. 인간을 신의 노예로 취급하는 이란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여론조사에서 미국민 36%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전쟁을 지지한다. 하지만 의회도 국민도 이를 저지하지 못한다. 유가에 고통 받으면서 트럼프의 입만 처다본다.
과거 근대 이전의 권력은 '신의 대리인'인 왕에게 있다는 왕권신수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 패러다임이 뒤집혔다. 우리 사회의 '배신자론'도 왕권신수설의 잔재다.
홉스, 로크, 루소와 같은 사상가들은 국가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합의(계약)를 통해 만든 것이라고 사회계약설 (Social Contract)을 주장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통치권의 정당성은 통치받는 자(국민)의 동의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천부인권설을 주장했고, 이 철학은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와 프랑스 인권선언(1789)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성문적 근거가 되었다.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이 원칙은 실제 정치 현장에서는 우리가 늘 관찰하는 바와 같이 허망한 구호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일찍이 "영국 인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 선거 기간뿐이다"라고 비판했다.
국민이 권력을 위임하는 순간, 실제 권력은 정치 엘리트나 관료 집단에게 넘어간다. 국민은 권력의 '원천'일 뿐, 권력의 '집행'에서는 소외된다. 권력은 휘두를 때 실제가 된다. 원천이 집행을 통제하지 못할 때와 원천이 대의의 숙의를 존중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권력의 칼에 베인다.
권력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왕처럼 행동한다고 통제의 제도가 가장 잘 설계되었다는 미국에서 "No King" 시위가 벌어진다. 우리 사회도 늘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을 자주한다. 민주주의는 왕이 되려는 선출된 권력자들과의 긴장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로베르트 미헬스는 어떤 민주적인 조직이라도 결국 소수의 지도자 집단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정당이나 국가 기구가 거대해질수록 전문 지식을 가진 소수 엘리트가 의사 결정을 독점하게 되며, 국민의 뜻은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나는 우리 정당의 공천제도가 이런 타락의 창구라고 자주 비판해왔다.
'1인 1표'라는 민주적 원칙은 거대 자본을 가진 이익집단이 로비나 정치 자금을 통해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평범한 다수 국민의 목소리보다 소수 자산가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괴리도 종종 생긴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원칙이 자칫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다수의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수자의 인권이 다수의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의해 국가의 장기적 이익보다 당장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 펼쳐질 수 있다.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에서 온다는 '원천'은 의미가 있는가? 권력의 칼날이 망나니 춤을 추는 시대에 우리 국회 벽의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권자, #망나니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