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불태우고 싶었다”던 거부(巨富)... '300억 기부' 그 뒤

[엄상익 연재소설] 자서전 작가를 만난 날

2026-03-24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오후. 나는 지하 주차장에서 카니발을 몰고 가평 쪽으로 향했다. 구리를 지나 춘천으로 빠지는 삼거리를 넘어 북한강을 옆으로 끼고 달렸다. 회색으로 얼어붙은 강이 길게 뻗어 있었다. 찬바람이 강가의 겨울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휴게소가 나타났다. 일 층은 식당이고 그 옆으로 기념품이나 농산물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있었다. 주차장 바닥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먼지와 엉겨 여기저기 더럽게 쌓여 있었다. 허상철 회장의 자서전을 쓴 작가가 만나자고 하면서 일러준 장소였다.

나는 작가를 수소문했었다.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는 TBS 방송에서 오랫동안 드라마를 써 왔다. 그는 허상철을 마지막으로 가장 깊이 만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인물을 미화하는 자서전에 못 쓴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딸인 허은정 교수를 빼고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상하게 관련자들은 딸의 눈치를 봤다. 돈을 받은 작가도 눈치를 볼 것 같았다.

허은정 교수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변호료를 지급하자 호소하던 태도가 명령조로 바뀌고 있었다. 자기가 말하는 것만 인식하고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소송에서도 전체적인 연출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빼고 작가를 만나야 했다. 책에 쓰지 못한 것들, 작가만이 알고 있는 그 가족의 민낯을 보고 싶었다.

30분쯤 기다리니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주차장 구석에 있는 코란도입니다. 차 번호는 47버 6823. 이쪽으로 오세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거칠고 탁했다. 나는 주차장 끝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코란도가 엔진 시동을 켠 채 정차해 있었다. 방금 도착한 것 같았다. 배기가스가 하얗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운전석에 흰 마스크로 얼굴을 거의 가린 남자가 보였다. 드라마 작가 박영훈 씨였다. 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안의 열기와 함께 진한 담배 냄새가 확 밀려 나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당뇨라 제대로 걷질 못해요. 그래서 차로 오시라고 했어요."

그가 양해를 구했다. 나는 차에 올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뒷좌석에 보행 보조기가 놓여 있었다. 접어 놓은 휠체어도 보였다.

"몸이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죠?"

내가 그를 살피며 위로하듯 물었다.

"예, 갑자기 앞니도 세 개가 빠져나가서 이렇게 마스크를 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집안 체질인지 운동을 하지 못하니까 갑자기 몸무게가 확확 늘어나 비대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부서져 가고 있는 노년의 모습이었다. 좁은 차 안에서 그의 숨 가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아프신데 뵙자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냥 몇 마디만 듣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물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씀드리죠."

짧은 대답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준비되어 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허은정 교수의 부탁으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허상철 회장에 대해 작가인 박 선생님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질을 알고 싶어 이렇게 만나 뵙자고 했습니다."

"인터넷에 TBS의 치부를 올려서 세상이 다 알게 폭로해야 합니다."

치부라고 했다. 늙고 병든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끓고 있었다.

"재단이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명사라는 이사장들은 무성의해요. 사회적 배경만 있지 실무는 전혀 몰라요. 명함에 이사장 직함만 박아 다니고 싶은 사람들이 성의가 있겠습니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사들도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없어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사무국장은 월급이나 타고 세월만 흐르면 된다는 태도죠. 하루 전화 몇 번 받고 퇴근하는, 그런 나태한 행동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마스크 너머로 거친 호흡이 들렸다.

"누가 재단 돈을 떼먹어도 추궁할 사람이 없습니다. 확인할 방법도 없고요.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재단인데 그 사람들한테 혜택이 가지 않는 겁니다."

그의 분노에 공감했다.

"허상철 회장은 노인이나 불우한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재단의 돈이 거기 가지 않고 퀴즈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나가더라고요. 재단의 운명을 걸고 기부자의 유지를 지켜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차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히터 소리만 웅웅거렸다. 창밖으로 주차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휴게소에 들른 평범한 사람들. 이 차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는.

"허상철 회장은 언 땅을 파헤치면서 배추 쓰레기를 주워 먹고 돈을 벌었죠. 그 마음을 아들이나 딸이 몰라요. 그리고 재단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죠."

그의 목소리에 진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책에 표현되어 있지 않은 행간의 허상철 회장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의미 있는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봤다. 마스크 너머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내 질문의 취지를 정확히 알아챈 것 같았다. 그만이 포착한 어떤 것. 책에 쓰지 못한 진실. 그걸 일부 공유하자는 제의.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팔십 대 중반인 허상철 회장을 만났을 때, 그분은 강한 허무감 속에 묻혀 있었죠."

거액 기부의 배경은 허무였나. 어떤 허무?

"돈 때문에 평생을 왜 노예같이 살았나 하는, 인생에 대한 진한 니힐리즘이죠. 허상철 회장 같은 북한 출신들은 월남해서 돈이 원수다 하고 목숨을 걸고 돈을 벌죠. 돈 버는 목적은 우선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이고, 그다음은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때를 위해서죠."

그의 시선이 창밖의 얼어붙은 강으로 향했다. 강 위에 쌓인 눈이 바람을 맞고 시간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허상철 회장을 비롯해서 북한 출신들이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돈을 모으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100원을 벌면 90원을 저축하는 기질들이죠. 허상철 회장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나 그런 내면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북한 출신이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죽을 때까지 마음에 품었다.

"제가 허상철 회장을 보니까 인생은 거의 끝이 나가고, 남쪽의 가족에게는 정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볼 희망도 없어지고. 그런 상태에서 인생의 마지막에 뭔가를 강하게 모색하고 있었어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나고 있었다.

"허상철 회장은 평생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돈을 불 태워 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 말이 진실로 들렸어요."

그의 눈빛이 허상철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때를 더듬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정말 그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자고, 그렇게 결심을 한 거죠."

"무엇이 허 회장을 그렇게 변하게 했죠?"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에게는 죽은 친구의 영혼이 찾아와 알려주었다. 허상철 회장도 그런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돈만 보였던 허상철 회장의 눈에 어느 날 어린 목숨들이 돈이 없어 죽는 게 보였어요. 그 역시 이북에 어린 자식을 두고 월남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허 회장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쪽방에서 혼자 죽어가는 가난한 노인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북에서 늙어간 아내를 떠올렸을 겁니다. 갑자기 망각 속에 있었던 자신의 과거가 보인 거예요."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허 회장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절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 쌀을 천 가마 주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군산에서 배를 빌려 쌀을 가득 싣고 고향에 가고 싶었던 거죠. 북이 남조선 자본가의 쌀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그 무렵의 겨울은 남쪽에서도 동사자가 많이 났습니다. 부두 노동자를 하고 청계천 판자집에서 절대 가난을 경험한 허상철 회장은 피부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한 겁니다. 허상철 회장은 허무의 돈을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산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죠."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허무의 돈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

"허상철 회장이 그렇게 돈이 많은 걸 가족들도 제대로 모른 것 같았습니다. 작가인 제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증권사에 전화를 걸어 증권과 채권을 사고파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어요. 수백 억의 돈을 주무르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다. 전대에 돈을 차고 잤다. 할머니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딸들도 그때는 아버지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전화로 3백 억을 기부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장난으로 알다가 나중에는 가족이 전부 놀라 자빠졌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일생 번 돈을 과감히 투척하는 허상철 회장은 작가인 제가 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달랐어요. 우선 기본 틀이 달라요. 목소리도 우렁우렁하고 말이죠. 누구 말도 안 듣는 성격입니다. '내가 돈 벌어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어떻게 할 거야?' 하는 강한 성격이었습니다."

"보시기에 허상철 회장의 성품은 어떤 것 같았습니까?"

"체면치레나 형식이 전혀 없었던 소박한 사람입니다. 평생 검소하고 소박했던 분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노인들이나 불쌍한 아이들, 탈북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남긴 그의 재산이 허영에 들뜬 이사장이나 이사들의 고급 호텔에서의 회의에 낭비되는 겁니다. 직원들 월급하고 방송국 프로그램이나 지원하는 죽은 돈이 된 걸 저승에서 허상철 회장이 보면 정말 불같이 화를 낼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이 허상철 회장의 일생과 마지막 소원을 짓밟아버리는 거니까요. 허상철 회장이 기부한 돈의 이자 가지고 평택 농장에 말뚝 하나 박아 놓는 성의만 있었어도 수십 억의 돈이 증여세로 국가에 바쳐야 하는 상황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겁니다."

그는 쌓아둔 분노와 슬픔을 털어놓았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아들이 아버지 돈을 뒤로 빼서 카지노를 들나들었어요. 허상철 회장은 자식 교육에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자식한테는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재단을 만든 겁니다."

본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단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무국장 자리를 놓고 방송국 출신 직원끼리 서로 가려고 싸움을 했어요. 다른 PD들은 일자리가 없어 지옥인데 사무국장은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있었어요."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초대 사무국장 딸 결혼식에 가서 방송국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무국장이 되기 위해 정치권 라인으로 서로 그 자리를 들어가려고 했죠. TBS는 기부자인 허상철 회장을 위해 방송국 주차장에 동상을 건립하고,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작가로 일하던 저에게 일대기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 허상철 회장의 동상은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방송국 주차장 구석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어요. 그의 일대기도 제가 원래 쓴 것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내용이 변경되어 발행됐죠."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방송국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죄하고 그 책임을 져야죠."

가슴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소송은 단순히 재산 분쟁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 싸움이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일었다.

"허상철 회장이 정말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게 맞습니까?"

작가가 나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책에 쓰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가 말을 멈췄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허상철 회장이 저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모든 재산을 기부한 게 아니라 그만큼 따로 남겨놨어.'"

"어디에 남겨 놨다는 겁니까?"

"자식들에게도 그만큼 돈을 주었다는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북에 있는 처자식을 생각해서 어떤 조치를 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확실한 건, 허상철 회장은 끝까지 계산하는 사람이었어요. 돈의 노예였지만, 동시에 돈의 주인이기도 했죠."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주차장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물었다.

"선생님은 허상철 회장이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작가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허무를 이기려고 했던 사람. 그런데 결국 다시 허무에게 진 사람."

차에서 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작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돌아오는 길, 북한강 위로 저녁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허상철이 죽은 지 10년. 그의 소원도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 밑에서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 텐데, 표면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허상철. 돈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그 돈을 던져버린 사람.

아직 허상철을 다 알지 못했다.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재단을 만들 때의 변호사를 만나야 했다. 법적 구조의 허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다음에 묘지로 갈 것이다. 허상철 회장의 영혼을 만나 당신은 정말 무엇을 원했습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차는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북한강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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