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시인의 편지] 앉은뱅이 수선화 피었다!

그리워하기 위해선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2026-03-20     이병철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왼쪽부터 동강할미꽃, 생강나무꽃, 홍매, 백매, 앉은뱅이 수선화. 사진 이병철 시인

​어느새 3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엊그제 영월 동강가에 둥지 틀어 살고 계시는 지인께서 동강할미꽃이 피었다고 연보랏빛 사진을 보내왔다. 나하고도 오랫동안 환경운동과 생명의 숲 운동 등을 함께했던 지인은 10여 년 전 서울살이를 접고 아예 동강가로 거처를 옮겨 동강지킴이로 살고 있다. 지금도 오래된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날마다 동강가를 오르내리며 생태계의 변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앞장서신다.

​그 지인과 함께 답사하며 만났던 동강할미꽃과 굽이 돌아 흐르는 유장한 물길이 사진 속에 겹쳐 떠오른다. 봄볕에 눈이 녹고 동강할미꽃이 피어나면 불어난 강물도 초록빛으로 짙어지리라. 윗녘에서도 이리 봄소식이 전해지니 이제 온 산천에 봄 물결이 출렁일 것 같다.

​집 앞마당에도 앉은뱅이 수선화가 노랗게 피어났다. 곁에 있는 다른 수선화들은 아직 꽃망울이 부풀지도 않았는데 이 꽃들만 먼저 피어난 것이다. 키 작은 이 수선화는 앞마당의 매화, 산수유와 함께 숲마루재(필자의 집)에서 가장 먼저 봄을 열어가는 전령이다.

​내가 도시살이를 접고 터 잡은 이곳은 남해안과 30여 분 거리로 가깝지만, 기후는 내륙성이라 겨울 기온이 해안과 5도 이상 차이가 난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낙남정맥이 기후대를 안팎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해안의 꽃소식을 듣고도 열흘이 넘게 지나서야 이곳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산줄기 하나가 이토록 엄정하게 기후를 가르는 것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이 말은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의미로,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정리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다. 선생의 대동여지도 또한 이 체계 위에 서 있다.

우리 땅의 근간인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을 건너지 않고 1,400km를 이어가는 거대한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이 대간에서 갈라진 마지막 줄기인 낙남정맥이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신어산까지 200km 넘게 다시 이어지니, 백두산부터 장장 4,000리 산줄기가 하나의 기운으로 흐르는 셈이다.

​내가 20년 넘게 새로운 둥지로 터잡아 살고 있는 곳은 그 낙남정맥의 안쪽으로, 낙남정맥의 중심축인 여항산에서 시작해 광려산을 거쳐 화개산으로 이어지는 이 능선길 아래이다. 이 능선을 화개지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집 뒷 능선길이 해안인 마산과 내륙인 함안을 잇는 낮고 부드러운 생명의 능선으로 지역의 물길과 바람, 삶을 이어주는 숨은 뼈대라 할 수 있다.

눈비가 내리면 그 물이 정맥의 능선 그 마루금 바깥은 남해안으로, 안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그래서 뒷산의 능선길에 올라 이 능선을 따라 이어가면 지리산과 백두산에 닿고 그것이 다시 저 지구의 지붕이라는 성산 히말라야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오르는 집 뒤의 이 능선길이 곧 성산 그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금 뒷산 화개산자락에는 노랗게 생강꽃도 피고 있겠다.

오늘도 정원님(필자의 아내)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의원에 오가면서 차창밖으로 환하게 피어난 매화와 산수유와 목련을 본다. 이곳에 꽃이 이리 한창이니 섬진강변의 매화꽃이나 지리산 자락 산동의 산수유는 이제 지고 있으리라 싶다.

해마다 마중나가 그 고운 자태와 풍경을 지인들에게 봄선물인양 나누었는데, 이번 봄은 다른 이들이 보내온 사진으로 아쉬움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워하기 위해선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은 두 발로 걸어가 마중하는 것에서 온다.'

내가 걸어가서 마주한 그 꽃이 나의 진정한 봄이라는 생각이 이 봄의 새로운 일깨움이다.

집 앞 뒤에 온 꽃 소식 나눈다. 오늘 내가 두발로 다가가 만난 봄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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