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내가 만약... 아이들 잘 부탁해'

본전을 다 찾은 거지. 암이 아니라도 다 죽어.

2026-03-19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30년 가까운 그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40대 중반쯤 한창 일을 할 때였다. 부산에 사는 고종 사촌형이 엑스레이 필름을 보내면서 부탁했다.

"폐암 진단이 나왔는데 실력 있는 서울 의사에게 확인해줘. 나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나는 사무실 건너편에서 개업하고 있는 진단방사선과 의사인 친구에게 그 필름을 가지고 갔다. 경기고와 서울대의대를 졸업한 그는 실력 있는 의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필름을 날카롭게 주시하더니 판결을 선고하듯 말했다.

"석 달."

형은 정확히 석 달 후에 죽었다. 아직은 50대 젊은 나이인데 하던 일을 그대로 둔 채 저 세상으로 건너간 것이다. 나도 불안했다. 하루는 그 친구에게 가서 검사를 받았다.

CT 모니터를 보던 친구가 마우스를 멈췄다. 화면을 확대했다. 다시 축소했다. 각도를 바꿨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친구의 얼굴 표정을 봤다. 친구의 손가락이 화면 한 점을 가리켰다.

"쓸개에 1.5센티짜리 혹이 보여."

친구의 표정은 시험지를 앞에 놓은 모범생이었다.

"설마...?"

"설마가 아냐. 이 정도 크기면 악성화됐을 확률이 높아."

"네가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내 진단이 틀린 적이 없어."

그는 위로조차 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왔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내가 죽으면 저 하늘도, 저 거리도, 저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집에 와서 침대에 쓰러졌다. 죽는다는 말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서울대 진단방사선과 과장으로 있는 친한 친구에게 내가 받은 CT필름을 보냈다. 오진이기를 바랐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암일 가능성이 많아. 일단 수술을 해봐. 그래야 확실히 알 수 있어."

권위자의 말이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천장만 보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살아서 숨 쉬는 동안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현대 아산병원의 의사도 암이라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았다.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사무실로 다시 출근했다. 의뢰인이 책상 위에 놓고 간 돈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평생 그 돈 때문에 뛰어다녔는데. 사건 정리를 시작했다. 맡고 있던 건들을 아는 변호사들에게 하나씩 넘겼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외아들인 내가 없으면 돌볼 사람이 없는 노인이었다. 젊은 아내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혼자 월남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소식이 끊긴 채 평생을 사셨다. 내 서재의 책상 앞에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는 상황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응."

"혹시... 제가 죽게 되면 양로원으로 가세요."

"-----"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에 물기가 괴더니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걱정은 말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나는 창밖을 봤다. 하얀 새가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살고 싶었다.

작년 겨울, 퇴계로 쪽을 지나가다가 본 담벼락의 문구가 떠올랐다.

'구걸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행복입니다.'

그때는 웃었다. 지금은 노숙자가 부러웠다. 자주 보던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이 부러웠다.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살고 싶었다.

수술하기 위해 입원하기 전날 밤이었다. 아내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보."

내가 아내를 보았다.

"응."

"내가 만약... 아이들 잘 부탁해."

아내가 손을 멈췄다.

"당신 새 행복 찾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

"그만해요."

아내는 손에 잡고 있던 침대 시트를 집어 들었다. 접었다. 펼쳤다. 다시 접었다.

나는 천장을 봤다. 가족과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고, 깃을 비비고 사는 게 행복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수술 당일 아침이 밝았다.

병원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봤다. 5월이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 야산이 보였다.

비단같이 부드러운 연두빛이었다. 아름다운 연두. 이 길로 다녔는데 저게 항상 저기 있었나.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신호등에서 차가 섰다. 횡단보도를 사람들이 건넜다. 출근하는 직장인, 등교하는 학생,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 모두들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나도 어제까지는 저랬는데. 부러웠다.

수술 전날 저녁, 의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암이 주위에 전이돼 있으면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암은 생존 기간이 평균 6개월입니다. 여기 서명하시죠."

펜을 들었다. 이름을 쓰는 볼펜이 떨렸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됐다.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이동 침대에 올랐다. 중앙수술실 문에서 어머니와 아내와 헤어졌다. 천정에 달린 하얀 등이 내 시야에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 같았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십자형 수술대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발가벗긴 채 그 위에 눕혀졌다. 손목과 발목을 묶였다. 실험실의 개구리가 떠올랐다. 인간이 별 게 아니었다. 수술실 안이 하드록 음악소리가 꽝꽝 울렸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이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마취의가 주사를 놓았다.

"하나, 둘, 하면서 천천히 숨을 쉬세요."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몇 초가 남은 삶의 전부일지 모른다. 살아온 날들이 슬라이드 영상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회가 일었다. 돈을 좇았다. 승소를 좇았다. 내가 없어지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지 못한 채 죽는 게 억울했다.

그래도 마지막 기도는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아버지 어머니 아래서 좋은 교육받고 잘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수술실 천장이 두 쪽으로 쫙 갈라졌다. 나는 깊은 어둠의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이었다. 캄캄한 창고 같은 곳. 한구석에 나는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순간 하얀빛이 퍼지면서 세상이 열렸다. 눈이 부셨다. 의사 두 명이 내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맥을 끊어내고 가스를 주입해 몸통을 복어같이 만들고 내장을 적출하는 여섯 시간의 수술이 끝났다.

한 달 후 병리검사 결과가 나왔다.

'전이 없음.'

나는 살아났다. 그리고 배웠다. 살아 있음이 축복인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나는 70대 중반에 가까워졌다.

그때부터 30년을 더 산 것이다. 한 달 전 고교 동기가 동해에 있는 내게로 찾아왔다.

"나 암 말기래. 뼈까지 전이됐대"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암이 아니라도 우리 이제 죽을 나이 아닌가?"

내가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칠십대 중반이면 우리는 살 만큼 살았어. 본전을 다 찾은 거지. 암이 아니라도 다 죽어. 어차피 죽을 건데 무엇이 문제지?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선물로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 친구가 한참을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그러네."

나도 그랬다는 과거의 얘기와 다 죽는다는 말이 위로가 된 것 같았다.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 그리고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임은 아닐까.

 


#행복은지금이순간 #인생의깨달음 #지금이행복 #삶의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