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100가마와 1억 수표…익명 기부자의 정체
[엄상익 장편소설] 수백억을 날려도 관념이 없는 반면, 짜장면 값이 조금만 올라도 분개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저녁 7시, 그랜드호텔 1층 레스토랑. 유리창 너머로 한강 다리 위의 차량 불빛이 붉은 강물처럼 흘렀다. 허은정 교수가 약속했던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미래 증권 상무 박민철. 감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금융인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몸에 밴 50대 말의 남자였다. 그가 공손하게 명함을 건넸다. 순간 그의 눈이 안보는 듯 예민하게 나를 관찰했다. 종업원이 물잔을 놓고 가자, 그는 잠시 시선을 잔 쪽으로 향하고 침묵했다. 옆에 앉은 허은정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의 눈은 허은정과 담당 변호사인 나의 신뢰관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허상철 옹이 기부할 때 실무를 담당하셨다면서요?"
내가 물었다.
"2000년경부터 회장님의 채권 매입을 맡았습니다. 어느 날 회장님이 통장들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TBS로 오라고 하셨죠. 폐섬유증으로 코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실 때였습니다."
박민철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이한별 국장이 휠체어를 가지고 나왔고, 허상철 회장은 방송국을 한 바퀴 돌았다. 윤성호 사장실에서 덕담을 나누고, 재단이 발족됐다.
"회장님이 저보고 감사가 되어 재단을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감사직을 수락 했죠.그런데---"
그가 잠시 주저했다. 그가 허은정을 보았다. 허은정의 눈은 어서 말하라고 지시하는 강한 눈빛이었다.
"그런데요?"
내가 재촉했다.
"재단 이사회가 타워호텔 꼭대기에서 열렸습니다."
박민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스테이크를 자르고 와인을 마시면서 회의를 하는데, 평소 허상철 옹의 검소한 모습을 봤던 저는... 그분이 아신다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허은정이 건넨 자료 중에서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허상철의 자서전을 떠올렸다. 대필작가가 써 준 것 같았다. 그 책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어느 날 어렸던 딸이 오원 짜리 동전을 하수구에 빠뜨렸다. 퇴근 후 그 얘기를 들은 허상철은 팔을 걷어붙이고 토관을 파내기 시작했다. 토관 두 개가 나오고 맨홀이 나타났다. 그는 구두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홀 속으로 들어갔다. 썩은 하수가 절반쯤 차 있었다. 그는 물을 퍼냈다. 이윽고 바닥이 드러나고 샛노란 오원짜리 동전이 보였다.
5원.
허상철 회장은 그 돈을 잃지 않으려고 똥물에 손을 담궜다. 그에게 돈은 신이었다. 그가 300억을 세상에 던졌다. 자서전 속의 허상철과 박민철이 모신 허상철은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한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더 이상한 건,"
당시 회의장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회의 내내 허상철 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잊히고 무시당하는 것 같았어요. 그분의 돈으로 만든 재단인데---."
안타깝고 안 돼 하는 눈빛이었다.
"제가 '허상철 회장을 위해 묵념이라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무시당했죠."
박민철의 얼굴에는 아직도 그때의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옆에 앉은 허은정의 눈에는 증오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회장님이 왜 저보고 '잘 지켜라'고 하셨는지."
"기부한 평택농장은 어떻게 된 겁니까? 재단에 거액의 세금이 부과됐던데."
내가 물었다. 허상철이 살아있을 때 평택농장으로 박민철을 불렀었다. 수목이 우거지고 배나무가 많은, 고속도로 가까운 땅이었다.
"이 농장을 탈북자를 위한 시설로 쓰는 게 좋을까, 아니면 노인 요양원으로 쓰는 게 좋을까?"
박민철이 장학재단을 제안했다.
"아니야, 노인들 돌봐줄 거야."
허상철은 단호했다. 자서전에 나와있는 장면이었다. 기부한 그 땅에 20억 원의 세금이 부과됐다.
"그 땅에 노인복지시설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장은 관심이 없었어요. 어떻게 처리하자는 것도 불투명했고요. 그렇게 방치한 대가죠"
그의 어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석민 씨는 여러 재단 이사장직함만 가지고 있지 일할 마음은 없어 보였습니다. 뭐라고 변명을 해도 20억 세금에 대해선 할 말이 없으실 겁니다."
마치 앞에 있는 이사장에게 따지는 어조였다.
"사실상 그분이 재단을 처음부터 주도했습니다. 일단 총리 출신 최진수를 이사장으로 몇 달 하게 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사회 원로 정명훈 씨가 이사장이었죠. 대가 약한 분이라 오석민의 의견이 거의 다 반영됐죠. 오석민이 이사장이 되자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한 사람 두 사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감사직을 내놓고 나왔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가 그만 둔 건 지금도 허상철 옹에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허상철 회장님과 인연을 맺었습니까"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있을 때 회장님이 수백 억의 거래를 하셨죠. 제게는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박민철이 손수건을 꺼내 살짝 입가를 닦았다.
"솔직히 처음엔 회장님이 이재에만 전념하는 무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막 욕하고 혼내시는 분이었으니까요. 이자도 0.01퍼센트만 다르게 해도 따지시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서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강남의 어느 아파트. 몇 십 년을 쓴 소파와 탁자, 칠이 벗겨진 가구들.
"거실이 왜 이렇게 더워?"
허상철이 버럭 소리치면서 보일러 온도를 22도로 내렸다.
"영감은 길거리에서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데 난 가스도 맘놓고 못 써요?"
아내가 되받았다.
"난 돈이면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사람이야."
그때 문에서 기척이 들렸다. 허상철이 현관문을 열었다. 벨을 누르려던 중년 남자가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명동에서 모금을 했던 사람입니다. 거액을 기부하신 허상철 회장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려고 찾아왔습니다."
"허, 헛걸음 하셨구만. 난 아니요."
옆에 있던 아내가 그 남자를 보고 말했다.
"맞아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영등포 역전에서 나온 주인 없는 수표도 우리 영감 거 맞고요.“
"수백억을 거래하시면서도 말입니다."
박민철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회사에서 기념으로 주는 국수를 가져다 드리면 너무 좋아하셨어요. 한 번은 고객들에게 주는 조기를 사 갔더니 '왜 이렇게 조그만 걸 가져와, 이왕이면 좀 더 큰 걸 주지' 하시더라고요."
박민철이 쓴 웃음을 지었다.
"한 번은 저보고 올 때 안경 쓴 미국 영감 간판이 걸린 가게 닭을 사 오라고 하셨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내가 되물었다.
"네."
박민철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따라서 씩 웃었다. 수백 억을 거래하고 부동산까지 하면 수천 억의 부자가.
"아이들도 쉽게 사먹는 그 닭고기도 고급으로 생각하셔서 쉽게 사드시지 못하는 분이었어요. 제가 사 가서 회장님과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죽은 그가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두쇠면, 증권으로 돈을 벌어드렸을 때는 어떤 보상을 해주셨습니까?"
궁금했다.
"회장님이 해주시는 최고의 대접이 마장동 소고기 파는 집에서 값싼 고기와 소주였죠. 그것도 큰 대접이었어요. 보통은 곰탕집에서 곰탕 한 그릇."
박민철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돈이 많아도 촌스럽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금융계에 있으면서 그런 분들 많이 봤어요. 수백억을 날려도 관념이 없는 반면, 짜장면 값이 조금만 올라도 분개하는 거죠. 힘들게 살던 시절의 작은 것들 가격이 머릿속에 각인돼서 반응하는 겁니다."
그가 누군가를 떠올리는 눈빛이었다.
"100억을 예금하고도 은행 앞에서 라면을 사먹는 경우도 흔해요. 돈만 벌다가 좋은 일도 못 하고, 자기도 쓰지 못하고 저 세상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엔 허 회장을 그런 졸부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솔직히 그랬죠."
박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우연히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희망마을 오수진 신부가 허상철 옹이 쌀을 가져다줬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었어요. 깜짝 놀랐죠. 허 회장님의 양면성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2001년 12월, 충북 음성군 희망마을. 낡은 외투에 빛바랜 중절모를 쓴 노인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김치 깍두기에 된장국 한 그릇. 다른 노인들은 그를 새로 들어온 의지할 데 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날 저녁 무렵, 80킬로그램들이 쌀 백 가마 실린 트럭이 비탈길을 올라왔다.
그 며칠 후, 명동 거리. 외환위기의 찬바람이 불었다. 소매가 닳은 남루한 외투의 노인이 봉투 하나를 모금함에 넣고 지하도로 사라졌다. 다음 날 조간 기사는 이랬다.
'모금함에 주인 모를 거금 1억 원짜리 수표! 얼굴 없는 독지가 올해도 다녀가'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 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런 변신이 왔을까.
서기 역할을 했던 박민철은 직접 경험했던 당사자였다. 수십 억을 벌어줬다고 곰탕 한 그릇 사주던 영감과 억대의 수표를 던진 노인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박민철이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마지막의 변한 허상철 회장은 모은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어요. 한번은 음성 희망마을을 다녀오신 걸 아주 리얼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환자들이 대소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그걸 닦아주는 사람들 얘기를 아주 자세히 하셨습니다."
그가 정말 깨달았을까. 김철수라는 노인은 허상철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팔순을 앞둔 그 친구가 300억을 내놓았다는 뉴스를 듣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얼마를 벌어서 얼마를 썼을까. 평생 입은 양복을 다 합쳐도 열 벌이 못 되고, 구두도 열 켤레를 못 신은 사람입니다. 휴전 후 청계천 2가 '명성옥'이라는 음식점에서, 허상철이가 저를 말렸습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언제 고향 가느냐'고. 제가 '먹어야 힘을 쓸 게 아니냐'고 했더니, '맹물만 마시고도 힘쓸 시퍼렇게 젊은 몸이니 꾹꾹 눌러 참고 돈부터 벌어 보자'는 거예요."
고향이라고 했다. 허상철의 친구는 이런 말도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그 친구가 수십 억은 벌었을 때 그 집에서 끼를 얻어 먹었습니다. 기가 막혔어요.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에 고추장 발라 구운 돼지고기 한 접시가 전부였으니까. 내 나이 사십을 넘기며 비로소 허상철을 스승으로 삼았죠.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했더니 정말 돈이 모아지고, 모아진 돈이 또 돈을 불러오더라고요."
자서전에서 본 내용이었다. 그런 게 그 세대의 사고 아니었을까. 허상철옹에게 돈을 모으는 법을 배웠다는 그 친구는 마지막 순간 어땠을까. 스승이 목숨같이 지키던 돈을 어떻게 했다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내가 물었다.
"갑자기 왜 변한 걸까요?"
박민철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곰탕 한 그릇을 보상으로 받았던 그도 300억을 투척하는 허상철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셨겠죠. 폐섬유증이라는 희귀병이었으니까."
나는 자서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80세가 다가왔다. 허상철이 입원해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폐섬유증. 의사들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렸다. 돈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평소 카지노에 드나들던 아들이 유산을 먼저 달라고 했다. 자식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때 허상철에게 심경의 변화가 왔다. 병원에서 우연히 본 백혈병 아기의 엄마에게 치료비 3,000만 원을 주었다. 그날 현금 1억 원을 병원에 기증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기부하기 시작했다. 자식들과 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아들을 피해 제주도 성산포 근처 빌라를 구입해 거기 묵었다.
2002년 여름.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는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슴 아픈 장면을 보고 울었다.
8월 7일, 그가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부액을 말하자 그들은 장난 전화로 알았다.
2003년 7월. 입원한 그는 혼수상태였다.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제... 틀렸어... 고향... 가고 싶었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민철이 말했다.
"그분에게 희망마을 사람들이 뭐였을까요. 쌀을 몇 트럭씩 보내시면서."
그는 옆에 있는 허은정을 의식하고 말을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허은정을 보았다. 눈빛이 유리알 같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고 임종을 지켰다는 딸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불빛이 흘렀다. 허상철 옹은 죽기 직전 가슴에 품었던 어떤 한이 있었던 게 틀림 없다. 그 누구도 모르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허은정에게 물었다.
"아버지 자서전을 써 준 작가일 걸요?"
"만나보고 싶습니다."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알아서 제게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작가를 만나 행간의 내용들을 꼭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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