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재판이 끝난 뒤, 왜 활명수 한 병?
담당 판사의 말이 불편하거나 불친절하면 알려주세요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나는 이따금씩 먼지가 끼고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변호사 수첩을 들춘다. 수첩의 페이지 마다 법정 풍경이 펼쳐지고 아우성 소리가 들리곤 한다. 세상이 변하고 법정도 달라졌다. 동료 변호사의 아들딸들이 판검사가 되어 법정에 앉아 있다.
그리고 나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 옛날을 회고하는 처지가 됐다. 오늘 펼친 수첩의 페이지는 벌써 30년 가까운 예전의 법정 풍경이다. 그 속으로 시간 여행을 가 봤다.
1998년 봄이다. 나는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시켜 점심을 때운 후 포텐샤를 몰고 수원법원으로 향했다. 고속도로 주변은 연두의 물감이 풀리고 있었다. 차 안에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부드럽게 너울을 일으키며 퍼지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십 분쯤 가니까 붉은 타일의 수원법원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 3층의 법정으로 들어갔다.
개정 전의 민사 법정은 텅 비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먼저 온 변호사가 빨리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 자칫 늦으면 오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나는 변호인 대기석에 앉았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둘 무거운 표정으로 법정으로 들어와 방청석에 앉았다.
남방셔츠와 바지를 입은 경비원이 방청석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사람들을 훑어 보고 있었다. 그가 한 남자를 보더니 말했다.
"아저씨, 씹고 있는 껌 뱉으세요.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아세요?"
주의 받은 남자가 슬그머니 껌을 뱉어 주머니에 넣는다. 경비원의 시선이 그 옆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 여기는 법정입니다. 모자를 벗으셔야죠."
노인이 얼른 낡은 모자를 벗는다. 대머리다. 몇가닥 흰 머리카락이 엉켜 있다. 경비원의 권위가 판사 못지 않은 것 같다.
그때 청년 한 사람이 법정에 들어와 방청석에 앉았다. 풍성해 보이는 양복 뒤에 근육질의 몸이 단단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의 위에 '변론기일 소환장'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 청년이 경비원에게 물었다.
"여기 119호 법정이라고 적혀 있어요. 거기로 나오라고 써 있던데요."
"그런 건 밖에 나가서 찾아보쇼."
경비원은 거드름을 섞어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이런 씨발, 불렀으면 친절하게 안내해줘야 할 거 아냐?"
근육질 청년의 태도는 여차하면 경비원의 멱살이라도 잡아 내동댕이칠 기세였다. 움찔한 경비원이 꼬리를 내리고 구석으로 가서 얌전히 딴 데를 보고 있었다. 법을 등 뒤로 한 경비원의 힘이 근육질이라는 원초적 힘에 기가 꺾였다.
법정 뒤 출입문이 열리면서 재판장이 두 명의 배석판사를 거느리고 나와 앉았다. 40대 쯤의 재판장은 차고 엄한 표정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보다 먼저 온 변호사가 사건번호를 말하고 재판장 앞에 섰다. 서기가 책상 위에 쌓여 있던 기록 중 하나를 빼내 공손히 재판장 앞에 올려 놓았다. 재판장이 그 기록을 펼치다가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이보세요, 원고 대리인. 이게 도대체 뭡니까?"
앞에 선 변호사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서류를 제출하시면 우리 법원에서는 그 상단에 두 개의 구멍을 뚫고 줄로 기록을 묶는 걸 아시죠?"
재판장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런데 제출하신 서류를 보면 그대로 서류 상단에 구멍을 뚫다가는 윗부분 몇 줄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귀찮게 내가 기록을 볼 때마다 묶여져 있는 줄을 풀고서 그 부분을 보라는 겁니까?"
지엽적인 문제였다. 그게 법정에서 논의될 사항인지 의문이었다.
"이건 초등학생한테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재판장보다 열 살쯤 위로 보이는 변호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건 진행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를 보면 둘을 알고 둘을 보면 셋을 아는 것 아닙니까?"
재판장의 비난의 수위가 높아졌다.
"아닙니다. 그동안 증인의 소재를 찾는 문제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음 기일에는 증인이 꼭 나오겠답니다. 만약 증인이 안 나오면 구인신청을 하겠습니다."
담당 변호사가 사정하는 얼굴이었다.
"그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을 보니까 나올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밀리는 사건을 정리하자면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결심해 버리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젊은 재판장에게 무안을 당한 그 변호사는 소송서류를 주섬주섬 가방에 챙기더니 슬그머니 법정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다음 사건이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증언석에 올라와 앉았다. 법정이 어색한 듯 주눅든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증인! 직업이 뭡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상업입니다."
"상업도 현대에 와서는 그 종류가 이십만 가지나 됩니다. 구체적으로 뭡니까?"
"건축업입니다."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재판장은 그렇게 말하며 소송기록을 들추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재판장이 "아" 하고 소리치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물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네. 이건 종이가 아니라 면도칼이야, 면도칼..."
얼굴이 찡그러지며 옆에 있던 배석판사를 보면서 소리쳤다. 그걸 보면서 재판장인지 아니면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나의 뇌리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봤던 천방지축 모차르트가 떠올랐다. 천재인 모차르트는 음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다. 체면도 도덕성도 없었다. 속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공부 선수로 일등을 했을 것이다. 책과 시험에 내몰리어 세상 구경은 거의 못했을 게 틀림 없다. 경험도 없고 재판받으러 온 사람의 마음을 들어다볼 여유도 없어 보였다. 세상은 그런 판결문을 정의라고 불렀다.
그날 법원 정문 앞을 나온 나는 그 옆의 약국에서 활명수를 사먹었다. 재판을 하는 날이면 위가 뒤틀린 때가 많았다.
세월이 흘렀다.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다. 어느 날 법정에서 나오는데 앞의 탁자에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담당 판사의 말이 불편하거나 불친절하면 알려주세요.'
법원에도 민원 처리 시스템이 들어온 것 같았다. 그 무렵부터 재판을 하러 판사가 들어오면 방청석을 향해 먼저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민주화가 되면서 세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칠십이 넘으면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동해 바닷가에 와 있다. 요즈음은 법정풍경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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