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시인의 편지] 통도사 자장매(慈藏梅) 앞에서 묻다

380년 건너온 붉은 봄

2026-02-21     이병철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사진 이병철 시인

통도사 자장매를 만나는 일은 거제의 춘당매(春堂梅)에 이어, 해마다 봄맞이를 위해 치르는 내 나름의 순례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순례를 거르지 않았는데, 올해는 연초에 춘당매만 찾아뵙고 한 스무 날 숲마루재(필지의 집)를 떠나 있었던 탓에 제때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20일 오후에야 숲마루재로 돌아와 오늘 서둘러 통도사로 향했다. 미루어 둔 일들이 있었지만 다른 해보다 열흘이나 늦은 터라 이미 핀 지 오래되었을 그 꽃들이 다 지기 전에, 마지막 뒷모습이라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간 통도사 영각(影閣) 앞은 온통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다행히 자장매는 여전히 붉은 빛을 놓지 않고 있었다. 꽃봉오리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만개하여 이제 지려고 하는 중이었지만, 검게 그을린 고목 위로 선혈 같은 꽃잎이 가득하게 피어 있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해마다 자장매를 만나왔어도 가지 끝까지 이토록 온전하고 지극하게 피어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수령 380여 년으로 추정되는 이 홍매는 1643년경,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찰을 중건하며 창건주 자장율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스님들이 영각 앞에 심은 나무라 전해진다. 그러니 3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장율사의 영정을 지키며 그 이름을 대신해 온 셈이다. 이 나무를 자장매라 부르는 이유도 그 숭고한 기다림과 기림의 뜻에 있을 것이다.

​380년이라는 세월은 나무에게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 이상의 무게일 터다. 사람으로 치면 수십 세대를 거쳐온 시간을 이 한 그루가 온몸으로 버티어낸 것이라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그래서 자장매 앞에 서면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시린 바람 속에서도 해마다 저토록 새롭게 피어나는 햇매화가 품고 있는 380년 세월의 깊이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다.

​나는 자장매의 굳고 검은 줄기에서 풍상을 견뎌낸 '인고'를 읽고, 가지 끝에서 돋아난 여린 햇꽃에서 '희망'을 본다. 낡은 것이 새것을 밀어 올려 주고, 새것은 다시 낡은 몸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이 아름다운 순환. 한결같되 늘 새롭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천이백 년 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품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원력이 서린 이곳엔 자장매 외에도 관음전 뒤편의 백매인 오도매(悟道梅), 그리고 분매(粉梅)와 만첩홍매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피어 있다. 자장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때문인지 분매와 만첩홍매는 지금이 한창이다. 

매화의 그윽한 향을 흔히 암향(暗香)이라 하지만, 나는 시린 바람을 뚫고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그 정갈한 기운을 '아린 향'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너무 맑아 정신이 아릿해지고, 그 짧은 만남이 애틋해져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 때문이다.

​향기를 듣는다는 '문향(聞香)'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뒤늦게 찾아온 객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준 자장매와 분매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소식 함께 나눈다. 올해도 이리 자장매를 뵐 수 있어 고맙다.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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