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거래에 한 여대생이 제물로... 이태원 美여대생 살인사건⑤
증거 없는 인도, 계산된 수사… 켄지 스나이더 사건의 기획자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이태원 미국 여대생 살인사건'은 연재 형식의 글입니다. 아래 관련기사부터 먼저 읽으면 좋습니다. (편집자)
사무실 책상 위에 DHL 박스가 놓여 있었다. 미국에서 와이스 변호사가 보낸 것이다.
박스를 뜯자 두 개의 서류 뭉치가 나왔다. 첫 번째는 와이스 변호사가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에게 보낸 서한의 사본이었다. 두 번째는 FBI 내부 보고서였다.
나는 먼저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Secretary Colin Powell
U.S. Department of State
Washington, D.C.**
편지는 정중하지만 절박했다.
‘스펙터 상원의원을 포함한 미국의 관료들은 한국에서 있었던 미국 여대생 피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해당 기관들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스펙터 상원의원과 압력을 가한 사람들은 죄인을 지명했고, 그 사람이 재판에 회부됐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죄인을 지명했다?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인가? 나는 그 부분에 클립을 끼워 넣었다. 편지는 계속됐다.
‘켄지 스나이더가 살해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본인의 자백뿐입니다. DNA나 지문, 과학적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목격자도 없습니다. 동기로 제시된 '동성애 거부'는 수사관의 추론일 뿐입니다.
이 사건은 피투성이 살인이었습니다. 살해범의 구두, 양말, 바지에는 반드시 피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켄지의 옷과 신발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켄지와 함께 있던 학생들—예런, 애날루스—그 누구도 켄지의 옷에서 혈흔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부분에 볼펜으로 굵게 밑줄을 그었다. 결정적인 증거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다음을 읽었다. 편지는 자백의 신빙성을 하나 하나 깨고 있었다. 마지막은 이랬다.
‘미국이 한국 법원으로 하여금 켄지를 판결하게 하려면, 과학적 증거를 수집해서 제시해야 합니다. 네덜란드와 핀란드 증인들의 증언을 확보해야 합니다. 켄지에게 필요한 방어 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미국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냥 유죄 판결을 받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았다.그런데 콜린 파월은 왜 켄지를 한국으로 보냈을까?
나는 두 번째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FBI Confidential Report
Date: February 7, 2002
From: FBI Seoul Office
To: FBI Headquarters
비밀 문서였다. 와이스 변호사가 어떻게 이걸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페이지부터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초동수사는 미군 범죄수사대와 한국 경찰이 함께 했다. 용의자는 미군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사건은 미결로 처리됐다. 시신의 상흔, 목격자 진술, 그리고 바에서 미군과 어울렸다는 정황까지 있었는데도 미결이라니. 이상했다.
상황이 변한 것 같았다.
피해자 부모가 펜실베니어 상원의원 스펙터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스펙터 의원실은 FBI본부, 국무부, 국방부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스펙터 의원은 서울을 방문하여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FBI서울 사무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켄지 스나이더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피해자와 마지막까지 있었던 인물이다. 동성간 성적 접촉 중 우발적 살인으로 추론했다.
그 다음부터는 FBI가 켄지를 자백시키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문서가 드러내는 구조였다.
나는 두 문서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와이스 변호사는 증거 없이 켄지를 한국으로 보내지 말라고 했다. 미국의 법적 정의를 지키라고 했다.
FBI는 피해자 가족, 의회, 한국의 반미정서까지 모두 계산하고 있었다. 미국은 "우리도 자국민을 처벌한다"는 메시지가 필요했다. 마침 이태원에서 미국 여대생 살인 사건이 있었다. 용의자는 미국인 여대생 켄지. 증거는 없지만 자백은 받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다. 피해자 가족(미국 유권자)의 민원 해결. 미국도 자국민을 한국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반미 여론을 완화하는 것이다. 설령 켄지가 한국에서 무죄를 받더라도, 미국은 손해 볼 게 없었다.
‘우리는 인도했다. 판결은 한국 법원이 한 것이다.’
그런 논리였다. 미국은 그런 나라였던가? 자유와 인권을 지켜주는 세계의 지붕이 아니었던가? 켄지는 지금 한국의 영등포구치소에 있다. 두 나라의 정치적 거래에 한 여대생이 제물로 던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번호판을 눌렀다. 신호가 가고 있었다. 상대방은 법무부 검찰국장. 고교 선배였다. 공직에 있을 때 같은 부서에서 일했고, 개인적으로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절친한 사이였다.
"선배님 접니다. 엄변호사."
"오, 그래. 무슨 일이야?"
"켄지 스나이더 사건 아시죠?"
"아, 그거. 골치 아파---“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좀 물어볼게요. 한국이 정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한 겁니까?"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글쎄 말이야."
전화 저쪽에서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FBI 한국 지부장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어. 한국계 미국인이던데.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라고 자꾸 그러는 거야."
"왜요?"
"효순이·미선이 사건으로 끓어오른 여론을 식히는 데 아주 좋은 조치일 거라고 하면서."
점점 퍼즐이 맞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뭐, 우리도 나쁠 건 없잖아. 미국이 자국민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게 해준다는데. 그래서 요청서 보냈지."
"증거는 확인했어요?"
"FBI가 자백 받았잖아. 그거면 됐다고 봤지."
선배와 나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 정도의 대화는 얼마든지 나누곤 했다.
나는 다시 FBI 보고서를 펼쳤다. 작성자를 확인했다. FBI 한국 책임자로 되어 있었다. 용산경찰서에서 만났던 그 남자 같았다. 그는 내게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외교관 자격으로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보니 그는 연출자였다. 자기가 수사한 결과를 내게 주입 시키려고 했다. 법정은 나와 그의 한판 싸움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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