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지금 '씨발' 이라고 했느냐?'... 영화관에서 만난 가문의 DNA
[엄상익 관찰인생] 좋은 일 했는데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아내와 시골 도시의 작은 극장에 갔다.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관객은 스무 명쯤 됐을까. 대부분이 노부부였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영화 속의 조상을 보러 왔기 때문이다.
배우 유해진이 척박한 깊은 산골의 촌장 엄흥도의 역할이었다. 째진 눈, 튀어나온 입. 못생긴 얼굴이다. 헐벗고 굶는 엄씨 조상들의 모습이 화면에 펼쳐졌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거지떼 비슷하다고 할까. 엄씨 조상들이 태백산맥 깊은 줄기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곳으로 폐위된 단종이 귀양을 온다.
귀양을 온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다.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귀양 온 양반들의 밥상을 차려줘야 하는 게 하층민들의 의무였다. 강에서 다슬기를 잡는 사람도 있었다. 벼랑으로 올라가면서 고사리를 따오는 사람도 있었다. 국과 반찬은 그 척박한 마을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 졌다.
귀양 온 왕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지자, 촌장 격인 엄흥도는 "아 씨발"이라고 하면서 왕과 멱살잡이를 한다.
"네가 지금 '씨발' 이라고 했느냐?."
왕이 물었다.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뛰었다. 왕의 환관이었던 엄 자치는 대왕대비에게 "쌍년"이라고 하는 게 드라마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변호사로 살아오면서도 급할 때면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씨발이라는 거친 말 속에 우리 조상의 혼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저것이다. 저것이 엄씨의 DNA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욕이라기 보다는 피속을 흐르는 평등 의식이었다. 저항정신이었다. 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기개였다. 나는 그 장면에서 엄씨 가문의 본질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왕과 무식한 촌장 사이에 묘한 우정이 흐른다. 엄흥도는 아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책이 없고 스승이 없어서 글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호소한다.
화면 속 소년이 왕 앞에 앉아 글을 배우고 있었다. 왕족과 천민 사이에 정이 통하고 온기가 흐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저 소년이 나의 머나 먼 할아버지일 것이다. 머리를 길게 딴 그 소년이 나의 뿌리였다. 가난한 평민의 자식이었지만 글을 배우고 싶어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 그것도 우리 엄씨의 DNA였구나. 나도 평생 글을 쓰며 살았다. 조상의 피가 내게 흐르고 있었다.
세조는 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 귀양을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단종은 그 사약을 거부한다. 마지막 자존심이다. 대신 엄흥도에게 죽여달라고 부탁을 한다. 엄흥도가 그 역할을 수행 한다. 권력은 죽은 단종의 시신을 강에 던진다. 그리고 그 시신을 거두면 일족을 다 죽이겠다고 경고한다.
차디찬 강물 속에서 엄흥도가 왕의 시신을 끌어 안았다.
"춥겠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둠 속에서 눈물이 흘렀다. 저것이 사랑이구나. 신분도, 권력도, 이익도 없는 순수한 사랑
엄흥도와 아들은 죽은 왕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왕명을 어겼으니 이제 그 일족들은 처형될 것이 틀림없었다. 엄흥도는 권력에게 이런 여덟 자의 글을 남기고 일족들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爲 善 被 禍 吾 所 甘 心'(위선피화 오소감심, 좋은 일 했는데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
그 글이 엄씨 문중의 정신이 됐다.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았다. 성경을 폈다. 출애굽기였다. 애굽의 노예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유대인은 노예였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전으로 만들었다.
엄씨 문중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흥도의 '위선피화 오소감심' 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백 년을 산 속에서 숨어 살았던 기록이 엄씨 가문의 자랑스런 경전이 되어야 한다. 숨어 산 것이 수치가 아니다. 그 속에 의리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신념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한밤중에 나는 엄씨 문중에 보내는 건의문을 썼다. 가난하고 천했던 조상들을 모습 그대로 인정하자고. 엄씨 문중의 시제(時祭) 광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조선시대의 붉은 관복들을 입었다.
나는 2년 전 문중 대표들에게 제안했다. 시제 같은 행사를 할 때 양반들이 입던 붉은 관복을 입지 말고 평민복을 입자고. 문중의 회장과 부회장은 내 생각에 동의했다. 얼마 후 문중 회의가 열리고 평민복을 입자는 안건이 올라갔다. 그리고 부결됐다. 반대 이유는 '하던 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변화가 싫은 것일까. 아니면 평민으로 내려오는 게 싫은 것일까.
나는 영화관 어둠 속에서 엄흥도를 만났다. 그는 가난한 평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진짜 귀함이 있었다. 그것이 엄씨의 본질이다. 엄흥도는 나다.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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