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美여대생 살인사건...“저는 제물입니다”

[엄상익의 관찰인생] 구치소에서 시작된 반전

2026-02-12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이 글은 연재 형식입니다. 아래 관련글을 먼저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편집자)

팔 없는 검은 조끼를 입은 담당 허 형사가 켄지의 신문조서를 받는 중이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창문 쪽에 형사반장이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변호사님."

형사반장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물을 게 있으면 먼저 하시죠. 우리는 그다음에 할게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켄지와의 대화를 수사하는 형사들이 다 들어도 될까. 변호인 접견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형사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변호사지만 죄를 감추어 주는 게 아니라 진실 쪽이다. 켄지가 정말 죄를 졌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미 대사관에서 나온 통역이 내 말을 전했다.

"여기는 경찰서인데 그래도 되나요?"

켄지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진실이라면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누구든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요?"

켄지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말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 다섯 명이 바에 갔어요. 이태원에 있는 니클비스라는 클럽이었죠. 세 명이 먼저 여관으로 돌아갔고, 제이미하고 저는 조금 더 있다가 나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바에서 나와서 작은 골목길을 지나갔어요. 세븐일레븐이 있는 골목이었죠. 그 길을 꺾으면 우리가 묵던 여관이 나와요."

시간 순서대로,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여관에 도착해서 제이미 방인 103호실로 갔어요. 안에서 애널루스가 먼저 자고 있었는데 문은 잠기지 않았더라고요. 제이미가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어요."

"그다음은요?"

"저는 제 방인 104호실로 갔어요. 룸메이트 예런이 자고 있었어요. 저는 셔츠 하나를 벗고 물을 마시고... 그냥 잤어요."

부지런히 기억 저쪽을 뒤지는 표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노크 소리가 들렸어요. 애널루스였어요. 제이미가... 죽어 있다고..."

켄지가 말을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물었다.

"AP통신 보도를 보니까 수사 도중에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하던데요?"

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형사님이 여권 돌려주고 가도 된다고 했어요."

켄지가 검은 조끼를 입은 허 형사를 가리켰다. 허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FBI에게 자백했죠?"

강력반 형사들이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다. 새로운 수사의 주춧돌이었다. 변호사로서는 자백의 신빙성을 깨야 한다. 켄지의 항변을 그들이 듣게 할 필요가 있었다. 켄지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얘기해도 FBI가 믿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사건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 행동을 계속 물었어요. 그런데 사실대로 말해도 안 들어주고... 제 기억까지 흔드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요?"

"계속 물어요. 같은 걸 다르게, 그러다 보면 제가 뭘 말했는지, 뭘 봤는지... 헷갈려요."

형사반장이 끼어 들었다.

"FBI 조사 방식이 은근히 최면을 걸었구만..."

수사를 받는 사람은 멘털이 무너질 때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걸 주입시킬 수 있다. 그런 경우가 있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수사관이 불러주는 내용의 진술서를 백 번 썼더니 나중에 자기가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이 되더라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켄지와의 대화가 끝났다.

나는 형사반장을 보며 말했다.

"이 사건은 한국 경찰의 수사와 미국 FBI의 수사가 비교될 것 같은데요."

미국 수사를 따르지 말고 적법절차에 따라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죠."

형사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반 사무실 가운데 있는 석유난로의 불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2003년 1월 7일 오전 11시. 쌀쌀한 겨울 아침이었다. 나는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딸 정아를 데리고 영등포구치소로 향했다. 정아는 켄지보다 한 살 많았다. 백인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낸 경험이 있어, 그들의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안에서 나는 딸에게 말했다.

"네가 통역을 할 때 켄지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해. 표정이나 말투,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점까지. 어떤 조그만 것도 흘려서는 안 돼."

"알았어, 아빠."

"진실은 법정보다 구치소에서 더 많이 발견되거든. 재판정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들어."

택시가 구치소 앞에 멈췄다.

회색 담장과 철조망이 보였다. CCTV의 검은 렌즈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변호사 접견실로 켄지가 들어왔다.

때 묻은 연두색 죄수복. 홑겹이었다. 겨울인데도 그 옷 한 벌이 전부였다. 금발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겨 하나로 묶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스무 살.

대학 2학년생이다.

"엄마 봤어요?"

내가 물었다.

"검찰청에서 봤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볼을 따라 흘렀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술이 떨렸다.

"감옥 생활이 어때요?"

"추워요. 그리고...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요."

"식사는요?"

"밥, 국, 김치가 나와요. 제가 먹기 힘들어하니까 교도관이 샌드위치를 가져다줄 때도 있어요."

"하루를 어떻게 보내요?"

"마냥 기다려요.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하루에 20분 운동 시간이 있어요. 그게 다예요."

"기다리는 시간엔 뭘 하죠?"

"교도관이 영어책을 넣어줬어요. 오 헨리의 단편소설이요. 그걸 읽어요."

은행원이던 오 헨리가 횡령죄로 감옥에 들어가 소설가가 됐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에 가고 싶어요."

우리에 갇힌 짐승의 절망의 눈빛이었다.

"키우던 고양이랑...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요."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냥 한 명의 소녀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켄지의 눈빛에 날이 섰다.

"왜 이렇게 감정이 북받치는지 모르겠어요. FBI가 모든 걸 계획했어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사인을 했어요. 저를 한국으로 보내라고."

"그게 무슨 소리죠?"

"미국에서 제 변호사를 통해서 다 들었어요. 저는 미국 정부의 제물이예요. 저와 미국이 싸우는 게 이 재판의 본질이에요."

스무 살 여대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범인인 미국 군인을 보호하려고 저를 희생양으로 삼았어요. 저는 그런 미국을... 이제 싫어합니다."

'미국 군인.'

그 단어가 화살같이 날아와 내 귀에 강하게 꽂혔다.

"누구죠?"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실은... 이태원 바에서 미군 남자 두 사람을 만났어요."

그녀는 사실을 얘기했을까.

"함께 춤추고 놀았어요. 한 명은 닉이라고 했어요. 하와이 출신 같았어요. 검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였고, 키는 175센티 정도. 파인애플 무늬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구체적이었다.

"또 한 사람은 믹이라고 했어요. 키는 비슷하고 짧은 군인 머리에 청바지를 입었어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미군 간호사라고 했어요."

"그들이 뭔가 이상한 행동을 했나요?"

"잔이 빌 때마다 술을 따라줬어요."

통역을 하던 딸 정아가 끼어들었다.

"아빠, 이상해. 우리 또래 미국 애들은 남한테 술 따라주지 않아. 각자 알아서 마셔. 그런데 계속 따라줬다는 게..."

나는 딸을 보며 물었다.

"켄지한테 그날 밤이나 다음 날 몸 상태가 어땠는지 물어봐."

"그날 밤은 거의 기절하듯 잤대요. 다음 날도 머리가 많이 아팠대요."

"제이미와 혹시 동성애를 했는지 물어봐."

나는 FBI 자백서의 핵심을 딸에게 말했다. 딸이 통역하기도 전에 켄지가 나를 보며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충 눈치로 내 말을 알아챈 것이다.

"아니요. 그런 일 없어요. FBI가 머릿속에 넣은 거예요."

딸이 통역했다.

"단계적으로 넣었어요. 처음에는 검은 구름 덩어리 같다가, 다음에는 회색이 됐다가, 그다음에는 영상이 되고 그림이 됐어요. 제가 못 봤다, 못 들었다 해도 그 사람들이 계속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어떤 사실이 만들어졌어요."

켄지가 손바닥을 앞뒤로 움직이며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켄지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지금 제가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구치소를 나와 담장 아래를 걷고 있을 때였다.딸 정아가 갑자기 말했다.

"아빠."

"응?"

"켄지가 아직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은 것 같아."

"왜?"

"미국 애들이 겉으로는 친절하게 자세히 말해도, 마음이 열린 것과 아닌 것이 있어. 거기서 살아보니까 구별할 수 있어."

나는 딸의 말을 곱씹었다. 켄지는 많은 것을 말했다. 하지만 핵심을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게 뭘까.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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