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효순·미선이 사건' 한 달 전에 날아온 수상한 이메일?
[엄상익 관찰인생] 촛불의 겨울, 미국이 던진 한 여대생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2002년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7시. 붉은 촛불의 물결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광화문 광장에 몰아쳤다.
"미군은 물러가라!"
"효순이 미선이를 살려 내라!"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위험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경찰의 방파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학생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 양복 입은 직장인들까지. 손에 든 촛불이 겨울 밤하늘을 밝혔다.
6월, 미군 장갑차에 두 소녀가 깔려 죽었다. 김효순, 신미선. 열네 살. 등교길이었다. 미군 군사법원은 운전병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민들 사이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SOFA 개정하라!'
한국 땅에서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분노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미군은 물러가라'
광화문 상공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경찰 헬기였다. 상공에서 인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회는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피를 부를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한 달 전쯤이었다. 나의 법률사무소 컴퓨터로 낯선 이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저는 필리핀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오영철이라는 사람입니다. 한 가난한 미국 여자의 딸이 엄청난 고난에 빠져 들었습니다. 지난해 이태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FBI는 한 여대생을 범인으로 몰아 한국에 제물로 던져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나 그 어머니는 절대로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어떻게 된 건지 그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변호료를 지불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초면에 연락을 올립니다.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소년이었다. 미국인은 천국에 사는 시민 같았다. 그들이 먹는 버터와 잼은 천상의 음식이었다. 미국인 선교사는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다리쯤으로 여겼다. 그런 미국인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요청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로 가슴이 뿌듯했다. 미국이 보낸 헌옷을 입고 그들의 밀가루로 연명하던 소년이 그들과 당당한 위치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건 혁명 같은 기쁨이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2002년 5월 16일자로 AP통신 기사가 있었다.
'지난해 한국에서 미국인 교환학생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켄지 스나이더(20,여 마셜대 학생) 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가 결정됐다.
스나이더 씨는 지난해 3월18일 대구 계명대학에서 연수 중인 동료 제이미 린 페니치(21, 피츠버그대 재학생)씨를 살해한 뒤 미국으로 도주했다. 스나이더의 어머니 히스 보조니 씨는 "내 딸은 아무 죄도 없다"고 했다.
반면 숨진 제이미의 부모들은 스나이더 씨가 "한국에 인도돼 사형을 선고받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나이더의 변호인은 스나이더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하는 수사기법을 사용한 FBI의 강압에 못 이겨 자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켄지의 한국 인도 여부에 관한 최종 결정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달려있다.'
의문이었다. 한국은 반미감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분노한 군중은 살인을 한 미국 군인을 한국 법정에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호응하듯 미국이 한 미국 여대생을 한국 법정에 내던진 것이다. 그것도 같은 미국인을 죽인 혐의로. 기사는 도주라고 썼다. 하지만 곧 알게 될 사실은 달랐다.
왜 미 국무장관이 그 결정을 한 것일까.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콜린 파월. 그는 왜 한 여대생을 한국으로 던졌을까.
나는 그때 몰랐다. 그게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미국의 '꽃놀이 패'인 것을.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 워싱턴이 아니라 서울에 앉아 있을 줄은.
사건의 연출자는 FBI 한국 책임자.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녀가 무죄일까. FBI가 증거도 없이 사람을 한국으로 던져 줬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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