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양생] 글공부 한 사람 중에는 왜 깨친 이가 안 나올까?

명상 수행은 두뇌의 활동을 외부의 도움 혹은 강제 없이 자기 의지대로 통제하는 기술의 터득

2026-02-06     신성대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신성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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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yoga)’가 인도에서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헨조다로 유적에 가부좌로 명상하는 신상의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더스문명 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당연히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요가’ 대신 ‘선정(dhyana)’이란 용어를 사용했었다.

‘요가’란 말은 어떤 ‘재주를 익힌다’는 의미이다. 가령 냄비를 만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이나 무예를 익히거나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요가이다. 중국어로 하면 ‘쿵푸(工夫)’가 되겠다. 명상은 물론 고행도 요가이다. 

석가세존도 처음에는 그 지방에서 유행하는 ‘슈라마나(沙門, sramana)’ 전통에 따라 고행을 했다가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명상(참선)으로 깨치자 자신이 체득한 요령을 전파하고자 나섰는데 그게 불교의 시작이다. 처음엔 수행체계였으나 점차 종교성이 강화되면서 오랜 전통을 가진 힌두교와의 논리 경쟁에서 밀려나 인도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당연히 인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가(수행법)가 전해지는데, 기원 후 4-5세기 경 파탄잘리가 정리한 ‘요가수트라’가 나오면서 비로소 독립된 학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행을 제계(制戒, yama), 권계(勸戒, niyama), 자세(姿勢, asana), 조식(調息, pranayama), 제감(制感, pratyahara), 응념(凝念, dharana), 정려(靜慮, dhyana), 삼매(三昧, samadhi)의 8단계로 정리해 놓았다. 수행에 들어 궁극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지만 반드시 순차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니 애써 경계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본격적으로 수행에 들어 호흡을 조절하면서 화두를 붙들고 집중을 하면 어느 순간 그 화두나 호흡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대뇌 전전두엽의 인식을 담당하는 부분만 남기고 다른 부분들이 휴면에 들어간다. 

그리되면 감각계도 휴면에 들어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그 상태를 '제감(制感)'이라 한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마음수행이다. 오래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의지(의식)로도 감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동물인 이상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그 경계심은 당연히 오감과 직결된다. 요가행에서 이 감각을 통제하라고 했지만 기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동물이든 낮에 활동할 때는 물론 잠을 잘 때조차도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대뇌 신피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 해서 렘 수면과 비렘 수면 상태를 찔끔찔끔 반복하면서 잠을 자는 것이다.

평소 우리는 오감에서 오는 신호가 대뇌를 자극하면 여러 가지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고 백(魄)으로 하여금 그에 대비토록 신호를 보낸다. 가령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절로 침이 돌면서 모든 의식이 화들짝 깨어버려 집중이 흐트러지고 만다. 그렇지만 수행의 어느 책에서도 제감하라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제감의 이치를 설명해 놓지는 않았다. 두 세기 전만 해도 인간은 뇌기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각도 자주 맡으면 그러려니 해서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게 되면 벽시계 소리는 물론 자동차 소음도 안 들린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둘러보면 모든 소음이 일시에 몰려온다. 심지어 전투 중에는 자기가 부상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싸우기도 한다. 

해서 옛 사람들은 집중을 통해 감각을 통제할 수 있음을 착안해 냈으리라. 파도 소리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벽시계 소리 등 일정한 박자가 있는 소음은 그걸 잊으려는 것보다 오히려 화두로 삼아 헤아리기도 했다. 문제는 불규칙하고 우발적인 큰 소음이다. 해서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잠들기 전에는 인식의 무게(부담, 의무, 작동)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깨어 있으면서 그 무게를 느끼지 않으려면 일단 혼백을 분리시키고 최소한의 의식기능을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휴지(최면, 수면)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대뇌의 오감의 인식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을 잠재워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할까? 드물지만 수행을 많이 한 선사나 요기들 중에 그런 특이능력을 보였다는 사례가 있으니 전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대뇌 콘트롤'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흔히들 수행은 잡념과의 싸움이라 말하지만 그 본색은 잠(졸음)과의 싸움이다. 다행히 대뇌는 각종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가 달라서 일시에 모든 부분이 잠들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휴면 상태에 들게 만들 수도 있다. 

해서 가수면 상태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씩 서서히 반복적으로 뇌의 ‘오작동(부분수면)’을 유도하는 것이다.(성급하거나 무리하면 정신착란을 일으켜 미쳐버릴 수 있다.)

제감이 되면 가장 먼저 수행자가 느끼는 것이 공중부양 같은 감각적 체험이다. 평소에는 느끼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중력에 의한 자기 무게를 완전히 잊은 데서 오는 환상적이고 신비한 체험이다. 

의식(인식)이 육신을 벗어나 무중력 상태로 공중에 뜨는 느낌으로, 우주인들이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는 감각적인 느낌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드물지만 보통 사람이 임사상태에서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명상 수행의 목적을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두뇌의 활동을 외부의 도움 혹은 강제 없이 자기 의지대로 통제하는 기술의 터득이라 해도 되겠다. 다시 말해 마취나 최면, 마약은 물론 무당의 굿이나 기도회‧부흥회를 통한 혼(魂) 빼기 등의 강제적인 수단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대뇌 각 부위를 잠재우거나 각성시키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깊은 명상 상태에 든 수행자들의 대뇌는 보통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될 만큼 아주 작은 부분만 활성화되는 증상을 보였다는 연구 사례는 많다. 또 그럴 때 방출되는 뇌파는 보통사람들의 수면 상태와 거의 비슷할 정도라고 한다.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집중으로 제감이 되고, 이어서 응념(凝念)에 이르게 되면 대뇌 신피질의 극히 일부분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 감각이나 기억, 판단, 운동 등을 담당하는 부위들은 모두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 

가령 어둠이 깊어지자 큰 빌딩의 각 사무실 직원들이 퇴근해버리고 하나 둘 불이 꺼진다. 가끔 어느 사무실에선가 전화벨이 울려도 아무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 당직실(수위실) 한군데만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최면과 비슷하면서도 반대의 원리로 기능하는 것이 몽유(夢遊)이다. 몽유는 병리적인 뇌기능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추신경계의 활성으로 인해 비렘 수면과 렘 수면 상태가 교란되어 생긴다고 알려져 왔다. 

최면 상태와는 반대로 인식‧비교‧분석‧판단을 담당하는 대뇌 부분(중앙통제실)이 휴지 상태인데, 다른 기억의 창이 의식의 허락 없이 열리는 바람에 이전에 행했던 명령이 활성화되어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디에 강하게 부딪히면 깨어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꿈이 헛것이긴 해도 거짓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건 귀신이건 꿈에서는 누구도 속이거나 속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뇌의 중앙통제실이 휴지상태에 들었기 때문이다. 의심이나 속임도 의지가 작동해야 가능하고, 그러려면 인식‧비교‧분석‧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각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도를 개입시켜 장난질을 치려면 그 부분이 깨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곧 꿈이 깨고 만다. 사유와 꿈은 바로 여기서 구별된다. 꿈의 이런 특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신성시 여기게 만들기도 하였다. 

드물게 눈을 뜨고 자는 사람도 있다. 최면과 몽유의 두 현상을 보건대 대뇌 활성화 부위를 조종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제감만 되어도 수행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헌데 불교에서는 여기에 무수한 철학을 갖다 붙여 한없이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과학 시대의 상상력으로 만든 현학들로 편견과 선입견투성이 억지논리들이다. 신(神)이니 내세(來世)니 하는 가상의 바탕 위에 세운 가설들이다. 그러니 황당할수록 더 그럴듯해 보인다.

증명이 안 되는 그 현묘하고 심오한 듯한 문자늪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해서 글공부(學文)한 사람 중에 깨친 이가 안 나오는 것이다. 못 나오는 것이겠다. 이들 덕분에 다음 사람들이 또 빠져든다. 그래서 교단이 유지되고 있다. 자아니 반야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중생구제니 하는 것들은 교단의 호객꾼들이나 떠벌이는 것이다. 

도가는 종교가 아니다. 요가도 종교가 아니다. 그냥 수행이다. 진리가 그렇듯 수행에는 인정사정 털끝만큼도 없다. 일단 종교적 교리는 다 버리고 생리적 현상에만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수행법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도(佛道)를 닦는 게 아니라 그냥 도(道)를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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