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국회의원 배지' 단 탤런트 정한용의 한마디

스스로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나의 내면

2026-02-04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영화 '삼포 가는 길'

늦은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새해 인사 드리려고요."

목소리가 떨렸다. 새해 인사치고는 이상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

동생은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요양사 자격을 따서 정신병동에서 일을 하는데 눈물이 나네요."

목소리에 슬픔이 서려 있다.

"왜?"

"과격한 정신병자가 많아요. 어제는 오전에 맞고 오후에도 얻어터졌어요. 나이 60이 넘었는데 이러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 바닥에 떨어진 충격을 그대로 받는 동생의 아픔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돈이라는 날개가 없이 추락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고등학교 동기가 아내와 함께 나의 사무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사업 실패를 한 그는 생수 배달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물통 두 개씩 들고 빌딩을 오르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고소를 당해 감옥에 들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악에 받친 표정으로 내게 따지듯 소리쳤다.

"똑같이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우리는 왜 이래요?"

나를 보고 비교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심리적 충격이 더한 것 같아 보였다.

인생은 항상 따뜻한 봄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바람 불고 얼어붙는 추운 날을 견딜 준비를 미리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작은 빌딩을 가지고 노년을 편안하게 사는 친구였다. 아들이 아버지 밑에서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들이 말이야. 갑자기 요양사 교육을 받겠다고 하더라구. 간병을 하는 일인데 자격을 따두겠다고 하더라구."

나는 친구에게 아들을 잘 두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이 녀석, 벌써 준비하고 있구나'

하지만 곧 의문이 들었다. 부잣집 아들이 막상 노인의 똥을 치우는 순간이 왔을 때 거리낌없이 해낼 수 있을까.

동해 바닷가 시골 도시에 산 지 5년째다. 이 도시는 '삼포 가는 길'이라는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동해항 공사장에 왔다가 물러앉아 포장마차에서 짬뽕을 만드는 김 씨를 만났다. 

그는 소설 속의 백화가 아니라 명자 씨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장터에 사는 임 씨는 어린 시절부터 태백산의 산판에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잘랐다. 바닷가에서 버스킹 연주를 하면서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사는 정 씨도 알았다. CD 200장을 팔았던 날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들의 세상은 바닥이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산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사람은 떨어지는 충격의 고통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들과 같이 동해 바닷가에 사는 나는 어떤가? 떨어지기 전에 스스로 바닥으로 알아서 내려온 건 아닐까. 어린 독수리 새끼가 나뭇가지 끝에서 뛰어내리듯 나는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낙하 훈련을 해 왔던 것 같다.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열다섯 살 때쯤이었다. 모두가 일등이 되기 위해 달렸다. ‘왜 그래야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제일 밑바닥에 떨어져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중단했다. 수업 시간에 듣지 않았다. 노트에 필기하지 않았다. 아예 교과서조차 가져가지 않았다.

시험시간이 되면 이름만 쓰고 십 분 만에 교실을 나왔다. 혼자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엄청난 해방감이 다가왔다.

60명 중 55등까지 내려갔다. 거의 바닥까지 왔다. 바닥에 있으면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독특한 편안함이 있었다.

삼십대 중반쯤 조직 생활을 할 때였다. 모두들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지 알 것 같았다. 능력이 부족한 내 주제가 일찍 보였다. 나는 내려가기로 했다. 사표를 쓰고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일거리가 없어 파리 날리는 사무실에서 표지가 닳은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시작으로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고교 동기인 탤런트 정한용이 찾아왔다. 치열한 선거전을 치른 그의 재킷에는 금배지가 반짝였다.

"아, 나 너무 좋아. 높은 놈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줄 서 있어."

그의 표정은 일등상을 받은 소년같이 환했다.

순간 그의 시선이 내가 보던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 위의 깨알 같은 활자 위에 머물렀다. 순간 그가 나를 보았다.

'이 좋은 세상에 너 뭐하고 있냐?'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이 칠십이 다가왔다. 인생도 단풍이 들면 아직 윤기가 남아 있을 때 나뭇가지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가지에 매달려 버티는 쭉쟁이의 모습은 좋지 않아 보였다. 동해 바닷가로 거처를 옮겼다.

스스로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나의 내면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려감이었을까 아니면 떨어짐이었을까. 권투선수가 먼저 맞는 연습을 하면서 맷집을 키운 건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게 나의 선택이자 해방이었는지 아니면 패배이자 굴욕이었는지도 모른다.

늙어서 모두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때 보인다. 높고 낮음, 부자와 가난이 허구였다는 것을.

나는 떨어질 때 충격을 덜 받기 위해 평생 연습했다. 이것이 바닥의 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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