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1991년, 한국 사회에선 이상한 '역전' 현상이?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는데.
[최보식의언론=정광제 전 이승만학당 이사]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이상한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다.
이 시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공산권은 종주국 단계에서 스스로 붕괴를 선언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경제적·정치적·도덕적 정당성을 동시에 상실했고, 더 이상 미래의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대한민국의 공론장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북한 체제나 공산권을 비판하는 발언은 “색깔논쟁”, “냉전적 사고”라는 말로 빠르게 봉쇄되었다. 세계의 흐름은 전진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역사 인식은 뒤로 가고 있었다.
당시 또 하나의 흐름이 동시에 형성되었다. 일부 기득권 세력은 냉전 종식을 과도하게 낙관했다. 북한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고, 남한이 의지만 가지면 체제 흡수도 가능하다는 판단이 확산되었다. 안보와 이념 문제는 더 이상 구조적 위협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잔여 문제로 취급되었다. 이 방심은 정치와 군사 영역을 넘어 역사와 문화 영역에서도 공백을 만들었다.
그 공백을 파고든 세력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문화권력 이론을 장기간 학습해 온 좌익 세력, 특히 종북 성향의 좌익 지식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제도 권력이나 경제 정책보다 교육과 역사 해석이 훨씬 장기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시기 그들은 총이나 선거가 아니라 교과서, 학계, 언론, 문화 담론을 통해 정통성을 재구성하려는 전략을 전개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자체가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989년부터 1991년에 이르는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이 전제하던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이었다.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주의로 이어진다는 도식도, 계획경제가 자본주의를 능가한다는 주장도 현실에서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좌파 역사 서술은 이 붕괴를 구조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붕괴는 외부 압력이나 일시적 실패로 축소되었거나, 서술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핵심 질문은 의도적으로 회피되었다.
이 태도는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인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계열이 제시한 이른바 ‘8월 테제’는 당시 국제정세를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승리”로 규정했다. 이 문건은 세계혁명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평화적 혁명 가능성을 강조했다. 조선 사회의 구체적 조건보다 세계사적 방향이 우선했다. 조선의 현실은 국제 혁명의 한 지점으로만 취급되었다.
이 사고방식의 기원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 문건은 조선공산당의 노선을 규정하고 조직 재편을 지시했다. 조선의 정치 현실을 내부에서 분석한 결과라기보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관점에서 내려진 지침에 가까웠다. 이후 조선공산주의 운동은 반복적으로 외부 혁명 도식을 내부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해방 직후의 사고방식도 이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와 유사한 태도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다. 1936년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스탈린 체제의 소련을 방문한 뒤 『소련기행』을 발표했다. 그는 소련에 대해 이상화된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유럽 지식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문제 제기는 곧 공산 진영 내부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비판은 반박되지 않았고, 동기는 의심받았다.
1937년 이 논쟁은 식민지 조선에도 전해졌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법학 교수였던 유진오는 조선일보에 「지드의 소련여행기―그 물의에 관한 감상 수제」를 게재했다. 그는 지드를 “배덕이나 변절을 한 인물로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소련 체제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유보했다. 그는 소련의 질서를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질서”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문제를 체제의 본질이 아니라 시행 과정의 문제로 처리한 것이다.
이 글은 당시 지식인 사회가 공산주의를 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명백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도 판단은 보류되었고, 비판은 절제되었다. 공산주의는 여전히 해석 가능한 미래로 남겨졌다. 이 태도는 해방 이후에도 반복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도 형태를 바꿔 지속되었다.
소련은 이미 해체되었고, 북한 체제는 김일성 사후 세습적 구조로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 인식은 여전히 도덕적 규정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유지되는지, 왜 붕괴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 대신 도덕적 분노와 오래된 교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역사 논쟁은 단순한 학술 토론을 넘어선다. 그것은 과거 해석을 둘러싼 다툼이자, 현재의 정통성을 둘러싼 충돌이다. 누가 해석 권한을 가지는가, 어떤 실패를 실패로 인정할 것인가, 어떤 체제를 현실로 분석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무기는 총과 포탄이 아니라 교과서, 담론, 도덕 언어, 그리고 침묵의 압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역사 논쟁은 실제에 가까운 전쟁이다. 전장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강의실과 지면, 방송과 문화 영역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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