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톨스토이의 왕성한 성욕...하이퍼 고나디즘
아내는 26년간 16번이나 임신하면서, 톨스토이의 성적 활력을 증명
[최보식의언론=강평기 러시아전문가('표트로대제의 개혁' 저자)]
키 크고 건강한 톨스토이는 지적 능력도 탁월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성욕도 왕성했다.
하이퍼 고나디즘(Hypergonadism), 의학적으로 성호르몬의 과잉 분비였다. 그만큼 생명력이 넘쳤고 성적 에너지를 발산했다.
작가 고르키는 휴양지 크름반도에서 톨스토이가 프랑스 소설가처럼 여자에 관해 너무 말을 많이 했는데 러시아 특유의 농민들처럼 거친 말을 막하여 불쾌했다고 했다.
체홉은 톨스토이가 자신에게 젊은 시절 방탕하게 놀았는지 묻기에 당황했는데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톨스토이는 청년 시기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 이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생활과 성병에 걸린 것마저 일기로 남겨 놓았으니 기록의 대가였다.
그가 쓴 『참회록』을 보자.
“나는 청년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너무나 끔찍해서 소름이 끼치고 역겨워지며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사람들을 죽였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있으면 결투를 신청해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노름해서 많은 돈을 잃었고, 농부들의 피땀을 갈취하여 살아갔으면서도 그들에게 형벌을 내렸으며, 방탕하게 살며 음행을 저질렀고 사람들을 속였습니다.거짓말, 강도, 온갖 추잡한 음행, 술주정, 폭력, 살인 등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는 없었습니다.”
이런 청년이 후에 도덕론자요 성자로 불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참회록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출간 후 작품이었으니, 세계적 명성을 얻었을 때 과감하게 자신을 참회한 톨스토이였다. 진솔하게 썼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은 늙어가면서도 마지막 자존심과 명예, 재산, 직위 등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게 보통인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은 후 자신이 존재하지 않은 그 세상에서 마저도 자신의 평판을 미화하기 위해 회고록를 쓰지 않은가.
톨스토이의 첫사랑은 소냐 콜로시나로 그의 첫 작품 『유년 시대』에서 소네치카 발라히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톨스토이는 화가가 그림에 자신을 투영하듯 자기 작품에 자신을 넣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작품 속 레빈을 톨스토이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
소설은 그의 생각과 행동의 동일시가 아닌 사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군 복무 시절, 톨스토이는 여성들에게 강하게 끌렸다. 세바스토폴 복무 당시에 관한 그의 일기를 필사했던 소피야는 그가 농노 여인들과 벌인 추잡한 행각을 묘사한 내용을 읽고 충격을 크게 받기도 했다.
1855년 군 복무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 당시에 주코바에게 극도로 매료되었고, 1856년에는 친구의 누이인 오볼렌스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어서 1857년 아르세니예바에게 매료되어 결혼을 결심했고,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 결혼 생활을 그리기도 했다.
계속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 사회의 젊은 여성들인 투르게네바와 블루도바-셰비치에게 매료되었으며 이 와중에도, 자신의 영지에 있는 22세 농노 여인 악시니야 바지키나(1836~1919)와 사귀었다. 유부녀였다.
1858년 5월 13일 톨스토이는 유부녀 악시니야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악시니야를 얼핏 보았다. 아주 아름답다. 요 며칠간 헛되이 기다리기만 했다. 오늘 그 거대하고 오래된 숲에서. 나는 바보다. 짐승 같은 놈. 붉게 탄 그녀의 뒷덜미. 나는 내 생애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사랑에 빠져 있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다. 괴롭다. 내일, 내 모든 힘을 다하겠다.”
이 여인과 사이에 1860년 아들이 태어났다. 티모페이였다. 톨스토이와 똑 닮았다. 키는 좀 더 컸다.
드디어 1862년 톨스토이는 나이 34세에 모스크바 의사의 딸과 결혼했는데 소피야 안드레예브나(1844~1919)였다.
솔직하고 정직한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야에게 결혼식 전날 자신의 일기장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말했다. 꼼꼼하게. 아내에게 솔직하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톨스토이식 사고방식!
그 일기장에 여인 악시니야와의 관계가 있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 소피야는 겨우 17세였다.
결혼 전부터 농노 여인 악시니야는 톨스토이 집으로 일하러 오기도 했는데 결혼 후에도 여전히 왔다. 아들 티모페이는 성장하여 톨스토이 집의 마부로 일했다.
소피야는 톨스토이가 죽을 때까지 이 건강하고 힘센 악시니야에 대해 질투했다. 1909년 4월 13일 톨스토이 아내가 쓴 일기를 보자.
“시골 처녀의 검게 그을린 다리, ‘건강한’ 여성의 신체에 대한 탐닉, 언젠가 몹시도 그를 유혹했던 그런 탐닉, 눈을 반짝이던 악시니야가 그랬을 것이다. 80이 다 된 나이에도 그는(톨스토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기억과 감각 저 깊은 곳에서 다시 그 여자가 떠오르나 보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참담하게 만든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결혼하고 실제로 모범적인 충실한 남편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가장 숭고하고 진정한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입니다.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은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한 여자와 평생 동안 함께 산 별난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아내는 이런 일기를 쓰기도 했다.
“남편의 뜻에 따라 나는 그로부터 16번의 아이를 가졌다. 살아남은 아이가 13명, 그리고 3번의 불행한 일(사산)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34세에 결혼하여 60세까지 아이를 얻었다.
세르게이(1863년), 타티아나(1864년), 일리야(1866년), 레프(1869년), 마리야(1871년), 표트르(1872년), 안드레이(1877년), 미하일(1879년), 알렉세이(1881년), 알렉산드라(1884년), 이반(1888년)이 태어났다.
이렇게 성인이 된 자녀는 8명이었고 아내는 26년간 16번이나 임신하면서, 톨스토이의 성적 활력을 증명해 준다.
아내는 남편이 이미 73세가 된 1901년 12월 2일 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정부(情婦)로서의 아내에 대한 그의 관계가 비로소 중단되었다.”
성생활의 종료였다.
톨스토이는 중년 이후 차츰 금주, 금연과 더불어 금욕을 주장했고, 아내는 톨스토이의 성적 이중성을 싫어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일기를 적어 그의 행동을 기록했다.
물론 톨스토이는 성욕을 자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했다.
톨스토이는 오랜 기간 성적 활력을 보여주어 “성 장수의 표본”이었고, 그가 죽은 후 9년이 지나, 1919년에 아내 소피야와 농노 여인 악시니야가 같은 해 죽었다.
건강한 육체, 왕성한 성욕, 천재적 재능, 탁월한 자제력, 활력 넘치는 삶을 살고 떠났다.
eurasiaworld33@gmail.com
#성욕, #안나카레니아, #전쟁과평화, #하이퍼 고나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