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교육'이 오히려 좌파에 승리를 갖다줬다?...그 역설의 해부
반공은 ‘정치적 교양’이 아니라 ‘지식의 금지’로 굳어졌다
[최보식의언론=정광제 전 이승만학당 이사]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반공교육은 출발점만 놓고 보면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6·25전쟁(1950~1953)의 기억은 여전히 사회에 남아 있었고, 북한 정권의 무장 도발과 간첩 침투는 실제 위협으로 인식되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반공은 ‘정치적 교양’이 아니라 ‘지식의 금지’로 굳어졌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려면 공산주의를 알아야 했지만, 당시의 교육과 공적 담론은 공산주의를 논박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고, 언급 자체를 꺼리는 금기물로 취급했다.
이 지점에서 6·25 이후 세대의 경험 구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1953년 정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전면전을 직접 겪지 않았다. “위협은 늘 존재한다”는 말은 반복해서 들었지만, 그 위협이 일상에서 체감되는 방식은 약했다. 이는 안보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안정의 결과를 설명과 학습으로 이어가지 못했고, 통제와 금지로 대체했다. 그 결과 젊은 층, 특히 대학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반공이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권력이 요구하는 의례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군사정부 시기의 언론·출판·학문 통제는 이 인식을 더욱 강화했다. 유신체제 이후 긴급조치와 각종 검열이 강화되면서, 반공은 국가 생존을 위한 논리이자 동시에 정권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겹쳐 보였다.
반공교육이 자유민주 체제의 자기 방어라는 명분을 유지하려면 일정 수준의 지적 자유가 병행되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반공을 강조할수록 “왜 토론을 막는가”라는 의문은 커졌고, 이 의문은 일시적인 반감이 아니라 지식인 집단 내부의 고정된 심리 구조로 자리 잡았다. 금지된 것이 오히려 '진실'일 수 있다는 오래된 인식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1970~80년대의 이른바 ‘신선함의 시장’이었다. 리영희, 박현채 같은 인물들의 책들이 당시 청년층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던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정밀한 분석이어서라기보다 기존에 접할 수 없었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공산권의 시각에서 본 세계 해석, 미국 비판, 베트남전과 중국 문제를 다르게 서술하는 방식은 금지와 단순화가 지배하던 환경에서는 그 자체로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리영희의 저작에서 중국 문화대혁명이 인간 개조 실험처럼 묘사되었던 대목이 널리 회자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 문장은 찬양으로도, 관찰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겼고, 금기의 사회에서는 그런 모호함 자체가 강한 파괴력을 가졌다.
이 지점에서 정부의 책임은 분명해진다. 반공교육이 실제로 반공을 강화하려면 공산주의의 작동 방식, 내부 논리, 실패 사례를 체계적으로 가르쳤어야 했다. 소련의 계획경제가 왜 비효율을 낳았는지, 일당독재가 어떤 경로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는지, 문화대혁명(1966~1976)이 어떤 폭력과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는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떤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는지 같은 내용이 교과서와 강의에서 다뤄졌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공식 담론은 세계사적 비교를 확장하기보다 국내 정치적 구호를 반복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한국적 민주주의’, ‘국풍’ 같은 표현은 세계사를 설명하기보다는 시야를 좁히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우익 진영이 좌익과의 논쟁에서 밀리는 이유는 자료 부족이 아니라, 상대의 사고 체계를 이해할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가능해졌다. 알고 반대하는 것과 모른 채 반대하는 것은 논쟁의 성격 자체가 달랐다.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1978년 8월에 출간되었고, 이 책을 계기로 ‘분단시대’라는 명칭은 학계와 대학 사회에 널리 퍼졌다. 이 책에서 제시된 분단체제론은 한국현대사를 1948년 체제의 정통성 문제로 집중시키는 강한 해석 틀을 제공했다.
이 틀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완결된 국가라기보다 극복되어야 할 과도기적 체제로 이해되기 쉬웠다. 그 결과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의 정치·경제·사회 변화는 국가 건설의 성취라기보다 분단체제의 산물로 재배치되는 경향을 보였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 틀은 대학 사회에서 하나의 기본처럼 작동했다.
더 심각했던 문제는 같은 시기에 정통 역사학계가 현대사 연구와 교육의 공백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점이다. 1980년 차하순, 최정호, 유영익 등은 한국현대사가 연구와 교육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계간 현대사』를 창간했다.
창간호는 6·25전쟁을 중심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지한 논의를 담고 있었지만, 전두환 정부는 이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고 학술지는 곧 폐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계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위험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화했고, 정부는 현대사 연구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 사이에 남은 빈자리를 채운 주체는 재야와 운동권이었다.
이 시기에 널리 읽힌 책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리영희 계열의 국제정치·현대사 관련 저작들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정통 학계가 비운 공간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채웠는가에 있다. 운동권은 자체 교재를 만들었고, 세미나를 통해 내용을 재생산했으며, 요약본과 발췌본을 통해 내용을 확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냉전기 소련과 북한에서 발간된 출판물들은 원전이나 참고서처럼 취급되었다.
1938년에 간행된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약사』는 스탈린 체제의 공식 교과서에 해당했지만, 스탈린 사망 이후인 1956년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거치며 소련 내부에서도 강하게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독서 목록에서는 이와 같은 낡은 텍스트들이 '금지된 지식'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권위를 획득했다. 내용의 시대착오성보다 국가가 막아왔다는 상징성이 더 크게 작용했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통사』(1958년), 『현대조선역사』(1983년) 역시 비슷한 경로로 읽혔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의 시각이 아니라 북한의 관점에서 한반도 현대사를 서술했고, 반미·반대한민국 정서가 전제된 문장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런 텍스트가 학부 세미나에서 비판 대상이 아니라 설명의 틀로 사용되면서, 이후 논문 주제 설정과 사료 해석 방향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좌파 현대사 인식의 외부 원천으로는 오랫동안 브루스 커밍스가 거론되어 왔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군정, 분단 형성 과정에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며 논쟁을 촉발했다.
그러나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은 좌파 인식 틀이 외부 학자에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박헌영의 해방정국 인식 틀에서 구체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제기해 왔다. 이 주장은 좌파 역사 인식을 단순한 수입 이론이 아니라, 해방정국 좌파 정치 노선의 연속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박헌영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미군정에 대한 규정, 건국 세력에 대한 평가, 친일 청산을 둘러싼 언어들이 이후 운동권 교재와 대학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지적이다.
이 흐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는 반공을 강화하려다 지식을 금지했고, 정통 학계는 현대사 연구의 공백을 오랫동안 방치했으며, 그 공백은 운동권이 교재와 세미나, 독서 목록으로 채웠다. 그 과정에서 한 세대의 기본 인식 틀이 형성되었고, 그 세대가 교수와 언론인, 출판 기획자가 되면서 하나의 지식 공급망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오늘의 역사전쟁은 단순한 해석 차원의 논쟁이 아니다. 어떤 책을 읽고 자랐는지, 어떤 텍스트가 교재로 쓰였는지, 어떤 채널이 대학과 출판을 점유했는지의 문제다. 총알 대신 책과 강의안이 오가는 전쟁이다. 전선은 학술지, 교과서, 대학 강의실, 출판 시장, 다큐멘터리와 유튜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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