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첩보원 '명왕성'의 최후통첩

"세 곳의 비밀장소에 제가 숨겨둔 세 개의 007가방이 있습니다."

2026-01-29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명왕성의 증인 신문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북한의 수뇌부에 접근했던 그는 1급 국가기밀 자체였다. 정보기관의 방해가 없을까. 그가 증언을 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불안했다. 한 개인 변호사가 쇠꼬챙이로 국가 정보기관의 급소를 찌르는 것이다.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이 나라 정보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다. 비밀공작원이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것.

20층 아파트의 창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빌딩의 불빛들이 깜빡이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실타래 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재판부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재판장이 원고 측 대리인인 나와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을 판사실로 불렀다. 양쪽을 조용히 타협시키려는 것 같았다.

판사실은 무거운 공기로 꽉 차 있었다. 재판장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싫은 표정이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판례를 찾아보니까 간첩 노릇을 하던 사람이 법정에서 증언을 한 사례는 없습니다. 아니 딱 한 번 미국의 링컨 대통령 시절 공작원으로 남군 쪽으로 갔던 사람이 나중에 법정에서 진술한 게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세계 첩보 역사상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내가 소송을 제기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인가. 변호사의 일이 원래 그런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직업관을 가지고 있다.

재판장이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온 사람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국가 예산도 보상할 명분도 있는데 여기서 타협하고 화해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국가가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 역시 싸울 생각이 없다.

"저희 측은 이미 '부존재'라는 답변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정권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게 정보기관의 입장입니다."

존재하는 걸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그게 국가인가. 정보기관 대표의 위압적인 목소리에는 법원도 아래로 보는 기운이 깔려 있었다.

순간 나의 속에서 주먹 같은 게 치밀어 올라왔다. 선량한 박민영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가가 한 국민의 삶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박 사장은 단칸셋방에서 아내의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너무 뻔뻔스런 정보기관 대표의 태도에 재판장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 올랐다. 재판장이 감정을 자제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비밀공작원이 증언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생각입니다만-----"

재판부는 법정에서의 명왕성 증언을 뜨거운 감자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를 보면서 나는 국가라는 성벽에 한알의 모래알을 던진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승산이 없는 싸움일까.

"그렇다면 기일에 예정대로 증인신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정보기관의 대표가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재판장이 독백처럼 내뱉었다.

"나라가 어떤 때는 정말 비열하구만"

그 한마디가 내 귓전을 때렸다.

나는 판사실을 나서며 복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정보기관 대표의 로봇 같은 태도가 재판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동시에 정의감도. 내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나 혼자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일주일 후였다. 증인신문 당일 오후 2시. 법원 복도는 적막했다. 비공개 재판이었다.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석은 텅 비어 있었다. 명왕성은 나타나 줄 것인가. 나는 자꾸만 문 쪽으로 시선이 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법정의 천정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 불빛이 주위를 파랗게 비추고 있었다.

서기가 들어 오고 이어서 재판장이 배석판사 둘과 함께 법정으로 들어왔다. 정보기관 대표가 방청석 끝 그늘 부분에 있다가 앞으로 나왔다.

"증인 왔습니까?"

재판장이 방청석을 둘러보며 내게 물었다. 방청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보기관 대표의 얼굴에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국가기밀누설죄로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증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순간이었다.

검은색 점퍼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소리없이 법정문을 열고 그림자같이 앞쪽으로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명왕성이었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법정 안을 훑었다. 그의 눈빛은 면도날같이 반짝였다. 오랜 세월 긴장 속에서 만들어진 제2의 본능일까.

그가 증인석에 올랐다.

그가 천천히 정보기관 대표를 바라보았다. 마치 배신자를 응시하듯. 시선과 시선이 부딪쳤다. 파란빛을 튕겼다. 법정 안의 공기가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나는 신문 사항을 적은 서류를 꺼내 재판장과 판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정보기관 대표에게 주었다. 그들은 심사하겠다면서 먼저 달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 법을 먼저 어긴 국가는 내게 법적 권한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국민을 대리해서 불법적인 국가와 투쟁을 하는 위치다.

신문사항을 보았다. 국가기밀이 잔뜩 적혀 있었다. 손에 땀이 배어 잡은 자리가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비밀공작 사항이 폭로된 거죠?"

명왕성이 잠시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깊은 결의가 표정에서 느껴졌다.

"98년 2월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전 정권의 안기부장과 핵심 간부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꼈죠."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들이 비밀문건을 작성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공작을 하면서 보고한... 새 정권의 약점들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쓴웃음이 섞여 들어왔다.

"안기부 핵심 간부들은 그 문건으로 수사를 차단하고 자신들을 보호할 무기로 삼은 거죠. 그 비밀 파일이 정무수석과 대통령의 측근 정치인에게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비밀이 언론에 흐른 거죠. 언론에 나온 걸 보니까 전부 제가 보고한 첩보내용들이었습니다."

"신분이 노출됐군요"

내가 말했다.

"북과 남 양쪽에서 다 드러난 거죠. 그 순간부터 저는 양쪽에서 쫓기게 됐습니다."

더 깊숙이 공작 비밀로 들어가는 건 피하기로 했다. 나는 박민영 사장을 떠올리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이야말로 재판의 핵심이었다.

"박민영 사장을 비밀공작에 끌어들였죠?"

명왕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미안함 같은 게 스쳤다.

"제 책임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옆에서 보니까 박 사장이 북쪽에서 광고촬영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해결해 주면 튼튼한 거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편승 공작 계획서를 상부에 올려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박 사장 회사의 전무가 됐죠."

"박민영 사장이 북한에 돈을 얼마를 주었나요?"

"주위에서 돈을 꾸고 전세보증금까지 빼서 북한에 가져다 썼습니다."

이웃집에 살던 그는 힘들게 사업자금을 마련한 내막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는 시스템이 아니라 뒷돈을 줘야 일이 해결이 되는 사회니까요. 광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임 안기부장과 핵심 간부들이 비밀공작을 폭로하는 바람에 북한에 투자한 돈들이 다 날라가 버린 셈이죠?"

"그렇습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공작을 폭로한 안기부 책임자를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지금 박민영 사장이 단칸셋방에 살고 아내가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걸 보면... 저 개인이라도 배상해 주고 싶지만 저도 쫓기는 상황이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상입니다."

더 많은 비밀사항이 나오기 전 그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았다.

"반대신문 하시죠"

재판장이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에게 말했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명왕성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구두 소리가 법정 바닥에 울렸다. 그는 명왕성 바로 옆에 섰다. 위압적인 자세였다.

"공작기밀을 누설하면 어떤 응징이 있는지 알고 있죠?"

차가운 눈빛이었다. 협박조의 목소리였다.

명왕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자 아래 눈빛이 번뜩였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드나든 공작원에게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칼날이 서 있었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공작원마다 최후의 경우 허무한 이용물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까?"

정보기관의 대표가 주춤하는 표정이었다. 명왕성이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세 곳의 비밀장소에 제가 숨겨둔 세 개의 007가방이 있습니다."

재판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판사들의 눈이 명왕성에게로 쏠렸다.

"내가 실종될 경우 자동적으로 국내외 언론사에 배달되게 장치해 뒀죠.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그가 정보기관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서 이 나라 권력자에게 보고하시죠."

정보기관 대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긴박한 보고 사항을 놓고 노골적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명왕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표정이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이 나라가 박민영 씨나 저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섭섭합니다. 저질의 조폭사회에서도 이런 졸렬한 배신은 하지 않아요."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가 오리발을 내미니까 내가 증인을 서는 거 아닙니까?"

"-----"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재판장이 조용히 말했다.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명왕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야구모자를 고쳐 썼다. 법정 문을 향해 걸어갔다.

법정 문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섰다. 재판장을, 정보기관 대표를, 그리고 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분노가 아니라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국가는 비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문이 닫혔다. 둔중하고 메마른 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퍼졌다.

법정에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질식할 듯한 침묵이었다. 재판장은 메모하던 연필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보기관 대표는 서류가방을 황급히 집어들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금 목격한 것은 단순한 증언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국가에 던진 최후통첩이었다. 공작원으로 살다가 버림받은 한 사람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나는 천천히 서류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을 나섰다.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다. 차갑고 맑았다.

나는 그날 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명왕성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국가가 비겁합니다."

나는 진실을 법정에 올렸다. 증명을 했다.

국가는 이제 어떻게 나올까. 국가와 당당하게 맞짱을 떴다.


#명왕성의증언 #판결문한장5 #비밀공작원증언 #국가와개인 #법정르포 #엄상익변호사 #엄상익에세이 #엄상익못다한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