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언론은 이해찬 죽음을 포장하나...'애도'라는 외피를 두른 면죄부
죽음으로 미화하고 과오를 덮는 한국인의 정서 비판
[최보식의언론=정광제 전 이승만학당 이사]
한국 사회에는 죽음을 특별한 도덕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어떤 책임을 남겼는지는 잠시 접어두고, 죽는 순간 모든 것이 정리된 듯 말한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비판은 예의 없음으로 간주되고, 모독으로 취급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애도'라는 외피를 두른 면죄부다.
이 정서는 개인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을 방해한다. 살아 있는 동안의 행위는 기록과 증거의 대상이지만, 죽음 이후에는 감정의 보호막이 씌워진다. “이제 고인이다”라는 말 한마디가 질문과 비판을 차단한다.
무엇을 했는지보다 얼마나 비극적으로 끝났는지가 맨앞에 나온다. 잘못된 판단, 타인에게 남긴 피해, 공적 영역에서의 실패는 장례식장의 엄숙 아래 감춰진다.
이는 개인 차원을 넘어 정치와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폭력적 결정, 무능한 통치, 무리한 이념 실험을 이끈 인물이 사망하면 평가의 기준이 바뀐다. “시대의 희생자”,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구체적 행위는 사라진다. 살아 있는 동안 제기되던 비판은 냉혹함으로 낙인찍힌다. 죽음은 모든 논쟁을 종결하는 버튼이 된다.
이런 방식이 공동체의 질은 떨어뜨린다. 잘못을 정확히 짚지 않으면 같은 오류가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죽음을 이유로 덮어버린 판단은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개인의 비극에 공감하는 것과 공적 행위를 검토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 구분이 사라지면, 사회는 감정에 기대어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죽음은 단지 끝일 뿐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의 말과 행동, 남긴 기록에서 나온다. 애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애도는 검토를 중단하라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은 마지막 장면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를 차분히 살피는 일이다. 불편하더라도 그 과정을 거칠 때만 공동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한국 사회가 이 정서를 넘어서려면, 죽음 앞에서 말을 멈추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슬픔과 평가를 분리하고, 개인의 비극과 공적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
죽음을 미화하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사라진다. 그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데에는 언제나 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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