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언론의 '이해찬 神話化'에 묻힌 '외교관 전설'의 죽음

국가에 헌신한 인물의 죽음을 어떤 언어로 기록하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2026-01-27     김선래 기자

[최보식의언론=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예비역 육군준장)] 

연합뉴스TV(공로명), jtbc(이해찬) 캡처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살아 있는 권력보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지에서 드러난다. 특히 국가에 헌신한 인물의 죽음을 어떤 언어로 기록하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는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연이어 전해진 두 명의 사망소식은 이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한 명은 정치권의 실세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해찬 전 총리였고, 다른 한 명은 외교 현장에서 조용히 국익을 확장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을 보도하는 언론의 보도 경향을 보면 한국 사회는 확실히 병들어 있음을 느낀다. 언론이 두 사람을 예우하고 대하는 보도 성향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이해찬 전 총리가 베트남에 간 이유를 취재하여 심층보도하는 매체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왜 출장가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국민에게 소상하게 파악하여 보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다.

그런 것은 다 생략됐고, 이해찬 전 총리의 죽음은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민주화의 상징', '개혁의 설계자', '진보 진영의 전략가'라는 평가로 가득 채워졌다. 

그의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시도는 드물었고, 비판적 성찰보다는 추모와 미화가 우세했다. '전략가'와 '모략가'의 차이가 무엇인지 구분이 분명한데도 전략가로 칭송일색이다. 

반면,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의 별세는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한중 수교, 북방외교, 냉전 질서 해체 이후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힌 외교관의 죽음은 사회적 기억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외교관을 일러 국익을 위하여 외국에 파견되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시인인 헨리 워턴(Henry Wotton)경이 하였는데 최근에 우리나라는 지난 6월에 주요 국가의 대사를 소환한 이래 아직 후임자가 부임하지 못한 나라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진영이나 이념을 따지더라도 후임자가 올 때까지 직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외교가의 전통이자 불문율이었다. 외교라는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척도이기도 하고 전문직업 외교관에 대하여 국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다.  

이 대비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무엇을 가치로 기억하고, 무엇을 잊도록 훈련받아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정치권력은 서사로 남고, 국익은 행정 기록으로 묻히는 구조.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의 언론은 기억의 심판자가 아니라 기억의 편집자가 되어버렸다.

이해찬 전 총리는 분명 한 시대의 권력 핵심에 있었고, 진보 진영의 조직화와 정권 창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추구한 권력의 방향성과 결과에 대한 성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등장하는 헤드라인이 "신림동 서점주인에서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다. 

'민주화'라는 단어는 그를 둘러싼 모든 논쟁을 무력화하는 보호막처럼 작동했다. 그러나 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며 가치이지, 면죄부가 아니다. 민주화가 특정 세력의 도덕적 독점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변질된다. 경쟁을 불공정으로 낙인 찍고, 성취를 특권으로 의심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공과를 재단하는 문화가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세대'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 비판 불가능한 신분이 되었고, 그 신분이 정치적 면책특권처럼 사용되었다. 언론은 이를 검증하기보다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일부 계층이 특권처럼 누리는 게 민주화라면 분명 잘못된 인식이다. 

공로명 전 장관은 대중적 정치 스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중 수교, 러시아와의 북방외교, 탈냉전기 한국 외교의 전략적 전환을 설계한 핵심 외교관이었다. 총성과 구호 대신 문서와 협상으로 국익을 지킨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은 정권의 선전물이 되지 않았고, 정치적 신화로 소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억되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이다.

국가의 외연을 넓힌 사람은 잊히고, 권력의 내연을 장악한 사람은 신화가 된다. 언론이 정치권력 중심의 기억 구조에 종속될 때, 국가는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내용은 비워진다. 그 간격을 메꾸어야 할 기관이 언론이고 기자이다.

이재명 정부가 이 두 인물의 죽음을 어떻게 예우할지는 단순한 의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기준으로 공헌을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상징적 선언이다. 정치적 충성인가, 국가적 성과인가. 서사인가, 결과인가.

바른 언론이라면 왜 이해찬 전 총리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리는가를 심층취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정치 구호가 아니라 외교, 경제, 안보, 과학, 산업 현장에서 묵묵히 일한 수많은 이름 없는 공로자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그들을 기록하는 데 인색했고, 정치권력의 이야기에는 과도하게 후했다. 이러한 문제는 백선엽 장군이 돌아가셨을 때 문재인 정부도 그러한 태도로 임했다. 

지금 우리가 묻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더 왜곡된 기준으로 역사를 배울 것이다. 누가 나라를 키웠는가가 아니라, 누가 권력을 오래 가졌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사회. 그것이 바로 한국 정치가 3류로 머무는 이유이며, 언론이 그 병을 키운 공범이 된 이유다. 

죽음 앞에서조차 공정하지 못한 사회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추모의 언어가 아니라, 기억의 기준을 바로 세우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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