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설계 기술자' 이해찬의 죽음이 남긴 유산의 상속자들?

상대를 악마화하는 순간, 정치는 국가 운영이 아니라 국가 파괴로 변한다

2026-01-27     박묘숙 기자

[최보식의언론=김정기 세계스마트시티기구 사무총장]

MBN 캡처

이해찬의 죽음은 한 정치인의 '부고'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한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 기획의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폐허를 남겼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죽음은 늘 정리의 계기다. 한 인물의 생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설계했던 정치의 문법을 정리하는 계기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하지만, 국정은 선거로 운영되지 않는다. 국정은 협상으로 운영된다. 선거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협상은 정당성을 현실로 바꾼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오래전부터 협상을 잃었다. 승리만 남았고, 통치의 기술은 사라졌다. 우리는 정권을 바꾸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점점 서툴러졌다. 정치가 국가 운영의 기술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기술로 변질된 탓이다.

나는 '한국형 협상의 법칙'에서 협상을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술로 정의한 바 있다. 협상이 무너지면 정치는 승리해도 국정은 실패한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인 YS(김영삼)·DJ(김대중) 시대 이후 한국 정치의 권력 구조는 한 가지 특징을 반복해 왔다.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대통령 개인의 자연발생적 성장이라기보다, 정치적 연합과 동원의 결과라는 측면이 강하다. 이 연합은 단순한 선거 공학이 아니라, 시대의 균열을 이용한 권력 설계였다. 그 설계의 중심에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전략가이자 기획자였다. 사람을 만들고, 판을 짜고, 전선을 그어 승리를 완성하는 킹메이커였다.

이 권력의 연합은 독특한 조합으로 구성됐다. 호남의 기반과 운동권의 조직, 그리고 영남 출신이지만 보수 주류 사회의 시각에서는 변방에 가까운 인사들이 결합했다. 이들은 출신 지역이 영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수 주류에 편입될 수 없었고, 고시를 통과했더라도 한국의 주류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사회적 승인과 통로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사회의 주류가 요구하는 문턱은 생각보다 높다. 한 번 “밖의 사람”으로 분류되면, 그 사람은 끝까지 밖에 남는다. 그 박탈감은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에너지는 선거에서 폭발한다. 이때 호남의 표 기반과 운동권의 조직력이 결합했다. 표의 엔진과 동원의 기계가 맞물리면, 그것은 강력한 선거 연합군이 된다. 여기에 영남 변방 인사를 내세우면 외연 확장까지 가능해진다. 선거는 이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방식이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 되면, 국정은 곧바로 전쟁이 된다. 이해찬은 바로 그 전환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기술을 넘어, 권력을 유지하는 기술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그 기술은 협상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상대를 인정하는 정치가 아니라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가 그 기술의 핵심이 됐다.

이해찬의 정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적대의 정치'다. 상대를 경쟁자로 두는 정치가 아니라, 제거 대상으로 삼는 정치가 자리 잡았다. 선거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증오의 동원으로 변했고, 정당은 협상의 주체가 아니라 전투의 도구가 됐다. 이 구조가 고착되는 순간, 국회는 타협의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전장으로 바뀌었다. 합의는 배신이 되고, 조정은 굴복이 된다. 협상은 사라지고, 선동만 남는다. 정치는 공동체를 묶는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갈라 치우는 기술로 변한다.

정치가 전쟁이 되면, 국가의 시간도 함께 무너진다. 국정은 5년을 바라보고 설계해야 한다. 산업 정책은 10년을, 에너지 정책은 30년을, 외교와 안보 전략은 50년을 내다봐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는 하루의 승리를 위해 내일을 불태운다. 상대가 추진한 정책은 무조건 폐기해야 하고, 상대가 만든 인사는 무조건 제거해야 한다. 그 결과 국정은 축적되지 못하고, 매번 리셋된다. 국가가 아니라 캠프가 운영하는 나라가 된다.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진영 시스템이 돌아간다.

그런 정치에서 지도자는 성장할 수 없다. 지도자는 검증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통해 제거된다. 실수는 선거로 심판하면 되는데, 우리는 실수를 범죄로 번역하고, 정책 판단을 수사로 재구성한다. 정치가 사법의 언어로 해석되는 순간, 지도자는 결단할 수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결단하면 공격받고, 물러서면 무능이라 조롱당한다. 그러니 남는 것은 무사안일과 회피뿐이다. 지도자는 비자발적으로 은퇴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버티다 소진되고, 끝내 무너진다.

우리는 흔히 “왜 지도자가 없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도자는 성장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실수할 권리도 필요하고, 실패를 복구할 기회도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만들기도 전에 죽인다.

그리고 지도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대체재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공백이 남는다. 그 공백이 반복되면, 국가는 장기 전략을 설계할 능력을 잃는다. 정치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 굳어진다. 우리는 최근 10여 년 동안, 정치인이 스스로 물러나는 퇴장보다 소진되어 퇴장하는 장면을 더 자주 보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치가 원래부터 이렇게 적대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 현대 정치에는 한때 합리적 중우와 합리적 중좌가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 김영삼의 개혁 보수는 합리적 중우의 한 축이었고, 김대중의 개혁 진보는 합리적 중좌의 한 축이었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국가 운영의 공통분모를 공유했다. 상대를 제거해야 존재할 수 있는 정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협상이 가능했고, 제도의 축적이 가능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가 무너지지 않는 최소한의 합의가 살아 있었다.

그 모델은 사실 전후 유럽 정치가 선택한 길과 닮아 있다. 전후 독일과 프랑스가 만든 민주주의의 핵심은 단순하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는 흔들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보수와 중좌가 필요할 때 대연정을 구성하며 국가의 기본 틀을 유지해 왔다. 선거는 경쟁하되, 국가 운영의 큰 방향은 합의로 지탱하는 방식이다. 프랑스 역시 정치적 갈등이 격렬해도 동거정치(Cohabitation Politics)를 통해 외교, 안보, 행정의 중심축이 쉽게 붕괴하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선거의 격렬함과 국가의 지속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한국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 운영의 합의다. 우리는 선거의 승리에는 집착하면서, 국가 운영의 합의는 경멸하게 됐다. 타협은 정치의 기술이 아니라 굴복으로 해석되고, 조정은 책임이 아니라 배신으로 낙인 찍힌다. 협상의 문법이 사라지면, 정치는 결국 감정의 정치로 추락한다. 감정은 지지층을 결집시키지만, 국가를 운영하지 못한다. 감정은 동원을 만들지만,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이 현상은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과 기득권은 어느 영역에서든 끝까지 지키려는 순간 출구를 잃는다. 퇴장은 결단인데, 한국 사회는 그 결단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퇴장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버티고, 마지막까지 싸우고, 마지막까지 분열을 남긴다. 정치는 그렇게 무너졌고, 사회도 그렇게 거칠어졌다.

이해찬이라는 킹메이커가 만든 정치의 핵심은 '연합'이었지만, 그 연합은 통합이 아니었다. 연합은 승리를 위한 기술이었고, 통합은 국가 운영의 기술이다. 승리는 정권을 만든다. 그러나 통합은 국가를 살린다. 우리는 승리의 기술을 과잉 발전시켰고, 통합의 기술을 방치했다. 이 차이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황폐화를 만들었다.

이제 한국 정치가 배워야 할 것은 분명하다. 선거의 기술이 아니라 통치의 기술을 복원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협상과 타협의 기술로 굴러간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순간, 정치는 국가 운영이 아니라 국가 파괴로 변한다.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국가적 성과가 평가받는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자의 조건은 카리스마가 아니다. 지도자의 조건은 협상력이다.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가의 장기 목표를 공유하는 능력이다. 협상 없는 정치는 결국 국가를 고립시킨다. 국내에서도 고립되고, 국제에서도 고립된다. 국정은 고립 속에서 성공할 수 없다.

이해찬의 한국 정치는 무엇을 남겼는가. 승리의 문법은 남겼지만, 운영의 문법은 남기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계속 전쟁의 정치로 갈 것인가, 다시 협상의 정치로 돌아갈 것인가. 정치는 전쟁이 아니다. 정치는 국가 운영이다. 그리고 국가는 전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승리는 정권을 만들지만, 협상은 국가를 살린다. 협상이 죽은 나라에서 미래는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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