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에 침묵한 한국 보수?
옳은 말을 하면 현상이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져 필요한 비판과 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최보식의언론=김정기 세계스마트시티기구 사무총장]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해 세 가지 대표적 정의관을 제시했다.
다수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공리주의,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하는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아우르는 덕과 공동선론이다.
이 세 관점은 때로 충돌하지만, 샌델은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체적 책임과 도덕적 용기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 보수는 법치가 무너지고 불의가 만연한 현실 앞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때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옭아매고, 눈앞의 불의를 외면한다. 그 결과 공리주의적 성과인 경제 안정과 안보 강화, 자유주의적 가치인 자유와 재산권, 그리고 공동체의 도덕성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지켜지지 못했다.
역사는 냉혹하다. 1930년대 독일 보수 엘리트들이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히틀러의 독재를 방치했을 때 민주주의는 단숨에 붕괴했다. 우리 현대사 또한 권위주의 폭력 앞에서 침묵했던 세력이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았음을 잊어선 안 된다.
샌델이 말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용기'가 사라진 보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의(義)를 생명보다 중히 여겼다. 목숨을 걸고 옳은 일을 행하는 용기는 동아시아 유교 사회가 정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농업시대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현대판 CEO처럼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어 벼슬을 잃거나 목숨이 위태로워도 권력 앞에서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이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의 상징이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보수정당 엘리트들은 고비용 구조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급격한 사회 구조 변화 속에서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옳은 말을 하면 현상이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져 필요한 비판과 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용기 내어 바른 말을 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침묵하거나 계산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겁함이 팽배하다.
보수가 침묵하는 사이에 법치주의가 흔들리고 공동체의 근본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정의란 공동체를 위한 용기와 책임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보수가 조선시대 선비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고 권력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보수란 기득권에 얽매이지 않고 공동체 정의를 실현하는 정신에 있다.
현실은 어렵지만, 한국 보수가 나아갈 길은 정의와 구조적 안정의 결합뿐이다. 즉, 도덕적 용기와 경제적 기반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보수 재건의 핵심이다. 정의 없는 보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정적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 보수가 살아남고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개혁이 필수적이다.
첫째, 정치 주체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보수정당은 판·검사, 행정고시 출신 고위 관료, 언론인, 교수 등 소수 중앙 엘리트에게 과도하게 의존해 왔다. 이들은 고도의 전문성과 막강한 영향력을 갖추었지만, 낙선 시 법조인을 제외하고 직업 복귀가 어려워 정치 실패가 곧 생존 위기로 직결된다. 국가와 당의 이익보다 개인의 생존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존의 중앙 엘리트에 의존하는 구조를 넘어, 지역사회 리더와 지역 변호사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 중소기업가, 시민 활동가 등 지역에서 경제 사회적 기반이 안정된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함으로써 정치의 저변을 넓히고 대표성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둘째, 정치 자금의 제도화가 핵심 과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약점은 안정적인 자금원이 없다는 데 있다. 고비용 구조의 선거를 치르면서도 기업 후원은 금지되고 개인 후원은 활성화되지 않아 정치인은 권력에 의존하거나 불투명한 자금에 기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이를 개선하려면 후원 행사(donation party)와 온라인 소액 기부 같은 개미 후원(grassroot donations)을 제도화해 시민 다수가 정치 자금의 주체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 후원에는 상한선이 있어 재정 자립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기는 어렵고, 후보와 직접 협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무제한 후원이 가능한 미국식 슈퍼 PAC 제도 역시 돈의 정치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한국 현실에 맞는 근본적 해법은 공적 선거 보조금을 투명하게 설계해 고비용 정치 구조 자체를 완화하는 데 있다.
셋째, 지속 가능한 정치 생태계의 구축이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약점은 단명 구조다. 국회의원은 4년마다 절반 이상이 교체되고, 낙선자는 곧바로 정치 무대에서 퇴장하거나 정치 낭인으로 전락한다. 영남에서는 보수 정당 공천만 받으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정치적 성장은 멈추고 식물 정치인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수도권은 인물 경쟁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에 불리한 선거 지형 탓에 낙선이 반복된다. 결국 정치인의 경험과 정책이 축적될 기회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기 성과에 매달리는 얄팍한 정치뿐이다.
이 악순환을 끊는 해법은 분명하다. 바로 선거제 개편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1등만 살아남는 구조가 깨지고 ‘은메달’로도 정치 무대에 진입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수도권에서 낙선만 거듭하던 보수 정치인에게도 길이 열리고, 국회는 보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 정치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력 관리와 정책 축적의 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낙선자의 경험을 흡수할 수 있는 정치 생태계가 필요하다. 정당 싱크탱크와 정책 네트워크를 강화해 낙선자들이 연구와 활동을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선거 결과에 따라 정치적 자원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일이 사라지고, 오히려 국가적 과제를 발전시키는 자양분으로 축적될 수 있다.
넷째, 정치적 신뢰와 안정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은 유권자의 잦은 물갈이 성향과 검찰·언론의 정치 개입에서 비롯된다. 정치인은 언제든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독립적인 선택을 하기 어렵다. 이를 해결하려면 유권자 교육을 강화해 정당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의 책임정치 문화를 확립해야 한다. 동시에 검찰과 언론의 정치 개입을 제도적으로 제어하고, 선거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혁해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
사람이 없고, 돈이 부족하면 도덕성도, 정책도, 신뢰도 지킬 수 없다. 보수 개혁의 출발점은 정치 주체의 다양화와 정치 자금 구조 개혁이다. 그 위에 지속 가능한 정치 생태계, 신뢰 회복이 차례로 쌓여야 한다. 사람과 돈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그 어떤 개혁도 모래 위의 집에 불과하다.
이제 보수는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고, 정치인의 생존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장기적 정치 구조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의 재탄생이다.
정치 주체를 다양화하고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 안정된 인물을 수혈하며, 정치 자금 조달 구조를 현실화하고, 장기 재임과 낙선 후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 정의와 용기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처럼 사람과 돈, 제도적 안전망을 갖춘 구조적 토대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정의 없는 보수는 생존할 수 없지만, 안정적 환경 없는 정의도 실현될 수 없다.
정의 없는 보수는 더 이상 보수가 아니다. 샌델이 강조했듯이 정의란 공동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잘못된 길을 봤다면 과감히 돌아서자고 말하고, 법이 무너졌다면 다시 세우자고 외치는 것, 그것이 보수의 존재 이유다.
따라서 침묵을 깨고 불의에 맞서 싸우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보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보수는 국민의 선택을 영원히 잃고, 역사 속 한 줄 각주로 사라질 것이다.
조선의 선비가 목숨을 걸고 ‘의’를 지켰던 것처럼, 오늘의 보수도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다할 용기를 내야 한다. 그 용기가 없다면 정의 없는 보수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이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다시 서서, 한국 보수의 길을 묻고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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