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시인의 인생] 가족 세우기
그 사람이 환하게 빛나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어제 오후, 영산강에서 지는 해를 배웅했다.
오늘 광주에 있는 치유 상담센터 ‘I & Family’에서 올해 첫 프로그램인 ‘가족 세우기’를 진행하면서 와서 격려도 해주고, 이 센터의 당호도 하나 지어달라고 센터를 운영하는 다시님이 초대했다. 그러나 오늘 오전부터 진행되는 일정에 맞추기는 힘들 것 같아 어제 오후에 미리 광주로 넘어왔다. 남는 게 시간뿐이니 이른 아침부터 서둘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광주에 온 김에 최근 해넘이 명소로 마련되었다는 서창 감성조망대에 들러 영산강의 해넘이를 배웅하게 되었다.
영산강에서의 해넘이는 두 개의 해를 함께 배웅한다. 산 너머로 지는 해와 강 속에 잠긴 해를. 서녘 하늘에도, 저문 강에도 노을이 붉었다.
영산강. 나주 평야를 적시며 목포로 흘러가는 이 강을 따라 오갔던 뱃길은 남도의 한(恨)과 흥(興)이 함께 흐르던 탯줄이자 젖줄이었음을 새삼 떠올린다.
치유 상담센터 ‘I & Family’를 운영하는 다시님은 교직을 명예퇴직한 뒤, 5년 전부터 이 센터를 꾸려오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관심을 두었던 터라, 다시님과는 오래된 인연이 있다.
오늘 진행된 ‘가족 세우기’는 이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초창기부터 참가해 왔던 작업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을 만든 버트 힐링거 박사가 2010년 한국에 와서 5박 6일간 워크숍을 진행했을 때, 우리는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힐링거 박사의 말 가운데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환하게 빛나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힐링거 박사는 독일의 심리치료사이자 철학자이며, 성직자이기도 했다. 현대 심리치료 분야에서 그는 매우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가 창시한 ‘가족 세우기(Family Constellations)’는 개인의 문제를 한 사람의 심리적 결함으로 보지 않고, 그가 속한 가족 시스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는 혁신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가족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작용하는 ‘사랑의 질서(Orders of Love)’가 있다고 보았다. 이 질서는 소속감, 위계, 평형으로 설명되는데, 이러한 질서가 무너질 때 후손들이 조상의 고통이나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대신 짊어지는 ‘얽힘(Entanglement)’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인의 우울과 질병, 삶의 불행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내가 이 가족 세우기에서 매번 놀라는 것은 이른바 ‘장(Field)’, 혹은 ‘앎의 장(Knowing Field)’이라 불리는 작용이다. 의뢰인과 전혀 관련 없는 대리인들이 그 장에 들어서면, 마치 무당이 접신하듯 원가족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힐링거가 제시한 강력한 화해의 문구들이다. 그는 복잡한 분석보다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내 몫만 책임지겠습니다.”와 같은 짧고 단순한 문장을 통해 엉킨 실타래를 풀고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돕는다.
그중에서도 “이제 당신을 봅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은 영화 아바타에서 내가 가장 깊이 감동했던 말, “I see you”와도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는 단순히 '내 눈이 당신의 겉모습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당신의 영혼을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존재가 빛나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참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는 힐링거 박사의 말도 바로 이런 뜻이리라.
이번 가족 세우기 워크숍은 그동안 꾸준히 작업해온 이들을 중심으로 매달 한 차례씩 진행되어 왔는데, 이번이 올해의 첫 모임이었다. 나 역시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참여하게 되어 느낌이 새로웠다.
장(Field)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놀라움은 여전히 컸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장 이론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다시 들었다.
가족 세우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리인의 반응을 섬세하게 읽고, 이를 토대로 작업을 이끌어 가는 역할인데, 다시님은 이 부분에서 매우 능숙하고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워크숍을 마무리하며, 내가 이 치유센터의 당호로 지어간 ‘자온재(慈溫齋)’를 전하고 그 이름을 함께 축하했다.
자온재란,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품고, 따뜻한 온기로 상처 난 마음을 데우며, 머무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는 집이라는 뜻이다.
나는 '자(慈)’를 어머니의 마음이라 새긴다. 내가 생각하는 ‘자’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품듯 조건 없이 안아 주는 마음, 판단하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근원적 자비를 의미한다.
‘온(溫)’은 따뜻함이 머무는 자리, 곧 온기와 체온, 따뜻한 숨결을 뜻한다고 할 수있다.
‘재(齋)’는 머무르며 닦는 집으로, 이 공간이 공부방이자 수행처이며, 일상과 수행, 쉼과 성찰이 분리되지 않는 자리를 의미한다.
내가 이 치유센터의 당호를 ‘자온재’라 이름 지은 것은 바로 이러한 뜻을 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치유센터를 이끄는 다시님에게는 ‘자온(慈溫)’이라는 새 이름을, 부군 니르바나님에게는 ‘청야(晴野)’, 곧 '비 갠 들녘'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두 내외와 함께한 이들이 모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로서도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작은 마음씀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치유센터가 자온재라는 그 이름처럼, 오래도록 잘 어울리는 자리로 깊게 뿌리내리기를 마음 모아 기원한다.
#치유센터, #힐링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