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탄핵 이후 정치는 오히려 더 잔혹해졌다
역사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공동체를 파괴한 세대로 기록할 것
[최보식의언론=김정기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전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전 상하이 총영사)]
오늘의 한국 정치는 민생을 논하는 공론장이 아니라, 저주와 혐오, 보복이 뒤엉킨 전쟁터로 변해 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적폐’라 부르고,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범죄 집단’으로 규정한다. 상대는 더 이상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정치의 언어는 공동체를 잇는 끈이 아니라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되었다. 그 사이에서 민생은 버려졌고, 대한민국은 증오의 정치에 인질처럼 묶여 있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정치는 투쟁이며, 통합 또한 투쟁의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치에는 통합을 향한 투쟁이 없다. 오직 '파괴'를 향한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통합 없는 투쟁은 맹목적 권력 다툼으로 전락하고, 공동체 없는 정치는 결국 폐허 위의 허상이 된다. 지금 정치인들의 얼굴에서 국민은 지도자의 얼굴이 아니라, 탐욕과 증오에 눈먼 권력의 사냥꾼을 본다.
1994년, 남아공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종차별 체제였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끝냈다. 수십 년 동안 누적된 증오와 폭력, 수많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킨 채 국가는 복수와 내전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넬슨 만델라는 피의 보복이 아닌 용서를 통한 국가 재건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선택을 했다.
그가 만든 것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 Reconciliation Commission)였다. 가해자는 처벌의 면제 대신 자신의 범죄를 국민 앞에 낱낱이 고백해야 했고, 피해자는 국가의 공식적 인정 속에서 존엄을 회복했다. 가해자는 무릎을 꿇었고, 피해자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아공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더 많은 피 위에 국가를 세우지 않겠다.”
보복의 쾌감보다 화해의 고통을 택한 그 결단이 남아공을 내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렸다.
이 장면은 나에게 결코 추상적인 역사적 사례가 아니다. 1980년대, 내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정치학과에서 미국 정치학, 소련 정치학, 유럽 정치학, 중동 정치학에 이어 아프리카 정치학을 수강하던 시절, 강단에 서 있던 한 교수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남아공 흑인작가협회장 출신으로 넬슨 만델라와 함께 남아공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대변인 역할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추방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추방의 끝에서 나의 모교 강단에 서 있었다.
그의 수업은 교과서 속 정치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옥의 냉기, 검열의 공포, 인종의 굴욕, 그리고 자유를 향한 인간의 존엄을 직접 증언하는 정치였다. 그 강의를 통해 나는 시대착오적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혹함과, 그 체제를 무너뜨린 용서와 인내의 정치가 얼마나 위대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정치에는 그때 내가 보았던 만델라의 결단과 남아공의 용기가 보이지 않는다. 국회에는 회개 없는 오만만이 남았고, 정치판에는 용서 없는 보복만이 난무한다. 화해의 자리는 사라지고, 특검과 고발, 정치적 응징의 언어만이 공기를 채운다. 국회는 갈등을 치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갈등을 증폭시키는 확성기가 되어버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는 오히려 더 잔혹해졌다. 민주당은 특검을 앞세워 국민의힘을 내란 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정치적 몰살을 시도하고, 국민의힘은 제대로 된 반격의 논리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
사실 국민의힘이 택했어야 할 길은 단순했다. 탄핵의 적법성은 인정하되, 내란죄 성립 불가를 법리로 정면 반박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논쟁과 무기력 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여야가 끝없는 정쟁에 매달리는 사이, 국민의 삶은 정치의 도구로 전락했고, 청년의 미래와 서민의 내일은 보복의 소음 속에서 갈갈이 찢겼다. 대한민국은 지금, 미래로 나아가기보다 과거의 증오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정치는 본래 증오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는 기술이었다. 미국은 9·11 이후 초당적 협력으로 국가안보 체계를 재건했고, 독일은 대연정을 통해 위기를 건넜으며, 남아공의 만델라는 복수 대신 화해를 택해 내전을 막았다.
우리 역시 그런 순간이 있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독재와 민주화의 갈림길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 결단이었고, 1990년 3당 합당은 분열된 정국을 재편해 안정적 국정 운영의 길을 열었다. 1997년 DJP 연합 역시 불완전했지만 국가 위기를 넘기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정치가 파괴가 아니라 통합의 도구였던 시간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에서 우리는 그런 기억을 찾기 어렵다. 화해의 언어는 사라지고, 증오의 수사만 남았으며, 국가의 미래보다 정파의 이익이 앞선다. 지도자는 사라지고 정치꾼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 있다.
오늘의 국회는 회개 없는 오만과 용서 없는 보복으로 가득 차 있다. 고소와 고발이 일상이 되었고, 몸싸움이 의정의 풍경이 되었으며, 정치 쇼가 국정을 대신한다.
그 사이 민생은 철저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일자리를 잃은 청년의 절규도, 생계를 잃은 서민의 눈물도, 지역 소멸과 산업 붕괴의 경고도 정치의 소음 속에 묻혀버렸다. 국회는 더 이상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정치는 권력을 움켜쥐는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는 책임이다. 증오와 보복만 남는 정치라면, 역사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공동체를 파괴한 세대로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화해를 택하고 민생을 선택한다면, 역사는 그 결단을 용기와 지혜로 기억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정쟁을 원하지 않는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협력이다. 여야 정치인들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경고한다. 국민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탐욕에 빠진 정치꾼으로 남을지, 아니면 시대의 무게를 견디는 지도자로 거듭날지는 이제 국민의 냉정한 심판 앞에 놓여 있다.
정치의 목적은 단순한 권력의 배분이 아니다. 공동체를 지키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이름으로 시작해 국민을 향해 귀결되어야 하며, 정치인은 권력의 주인이 아니라 국민을 섬기는 봉사자일 뿐이다. 위민(爲民)하고, 안민(安民)하고, 보민(保民)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며, 국민을 지키는 것—이 세 가지가 정치의 본령이자 지도자의 존재 이유다.
여야 정치인들이여. 이 본령을 되찾을 때 대한민국은 다시 희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끝내 외면한다면, 정치 그 자체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폭력이 될 것이다. 정치는 권력을 쥐는 술수가 아니라, 인간을 지켜내는 철학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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