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은 왜 정치를 해선 안 되는가... 반박이 어려운 9가지 이유
당게 사건은 한동훈의 리더십을 우연히 노출한 사건이 아니라
[최보식의언론=김정기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전 상하이 총영사)]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8일 ‘당게 가족 게시글’ 사건과 관련해 이호선 당무감사위원장을 고발했다.
한 전 대표 측은 “전혀 다른 사람이 작성한 글들을 한동훈 전 대표 또는 가족이 작성한 것처럼 조작한 감사결과를 공개한 이호선 당무감사위원장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개인정보보호법 및 국민의힘에 대한 업무방해 등 혐의로 어제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본지의 입장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게재한다.(편집자)
최근 국민의힘 당 게시판(당게) 사건은 사소한 당내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한동훈의 리더십을 우연히 노출한 사건이 아니라, 그가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더 정확히 말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결정적 장면이었다.
정당의 게시판은 민주주의의 소음이 응축된 공간이다. 불만과 비판, 과장과 오해, 때로는 감정적 언사가 뒤섞인다. 정치 지도자는 이를 단속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흡수하고 조정하는 설계자여야 한다.
그러나 당게 사건 내용이나 이후 그가 보여준 대응 방식은 설득도 조정도 아니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것은 정치인의 언어가 아니라 정치검사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호불호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정치권에서 22년간 직접 보고, 설계하고, 실패와 성공을 함께 경험한 정치의 구조 위에서 내린 판단이다.
필자는 거제도 출신으로 정치적 성장 과정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멘토로 두는 행운을 가졌다. 가족으로는 이기택 통합민주당 총재이자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의 막내 동서로 정치 리더십의 진수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이후 필자 자신의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해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개혁 공약 총괄과 국제위원장을 맡았고, 당대표 선거에서는 전략과 조직 총괄본부장을 하며 정치에서 가장 중시되는 조직·정책·전략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을 축적했다.
학계에서는 법학·정치학·경제학·역사학·사회학·미래학·협상학을 가르치며 정책을 전략과 비전의 언어로 전환해 왔고, 그 결과 ‘대한민국과 세계 이야기’를 집필했다. 정치 칼럼 약 500편, 유튜브 정치 평론 약 1,000편을 통해 정치·외교·국가 전략을 대중과 공유해 왔으며, 현재는 국제기구의 수장으로서 세계 국가 및 도시 지도자들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험 위에서 필자는 단언한다.
당게 사건은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정치검사 모델'의 전형적 발현이다.
정치는 이미지로 시작할 수는 있어도, 이미지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정치는 시간과 책임, 실패와 성찰의 축적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한동훈은 질문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아직 답이 될 수는 없다.
그가 왜 정치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그의 이력, 반복된 행태, 그리고 그가 상징하는 정치 유형에 있다.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의 조건은 분명하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인 대관(大觀), 공동체를 품는 덕(德),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 비전, 고난을 이겨낸 서사, 그리고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다. 이 기준에 비추면 결론은 명확하다.
첫째, 그는 대관(大觀)이 아니라 소찰(小察)의 인물이다.
정치는 숲을 보는 일이다. 개별 사건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관계와 갈등이 얽힌 전체 구조를 조망하고 그 속에서 균형점을 찾는 작업이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대관은 단순한 시야의 크기가 아니라, 장기적 결과를 감내하며 판 전체를 설계하는 통찰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사고는 여전히 나무를 단죄하는 시선에 머물러 있다. 사안을 쪼개 규정하고, 책임의 귀속을 명확히 하며, 결론을 신속히 내리는 방식은 수사와 재판의 영역에서는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오히려 위험하다. 정치의 갈등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봉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기보다, 문제를 선악 구도로 단순화하고 판정을 내리는 검사적 사고를 반복해 왔다.
이는 개인의 기질 문제가 아니다. 정치검사 모델이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다. 소찰은 사실을 밝히는 데는 유리하지만, 대관을 요구하는 국정 운영에는 치명적이다.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를 베는 정치는 결국 전체 생태계를 훼손한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죄의 정확성이 아니라, 전체를 살리는 판단의 무게다.
둘째, 그는 덕이 없는 냉혈한적 정치를 보여왔다.
정치에서 말하는 덕은 온정주의나 감상적 선의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해와 감정, 심지어 적대까지 견디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인내의 능력이다. 지도자의 덕은 상대를 꺾는 데서 드러나지 않고, 내부의 비판과 불편한 목소리를 품는 과정에서 검증된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는 이런 껴안음의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판은 조율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문제로 인식된다.
이견은 갈등의 신호가 아니라 질서 위반으로 해석되고, 토론은 정치의 일부가 아니라 위험 요소로 취급된다. 이러한 냉정함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을 높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신뢰를 잠식한다.
덕 없는 냉정함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적하며, 결국 정치 공동체를 분열로 이끈다. 지도자는 차가울 수는 있어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서 남는 것은 통제의 흔적이지 신뢰의 축적이 아니다.
셋째, 정책 비전이 사실상 제로다.
그의 정치에는 늘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라는 판단의 언어만 존재한다. 이는 수사의 논리에는 유효할 수 있으나, 국정 운영의 언어는 아니다. 국가는 심판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선택과 조정, 우선순위 설정을 통해 굴러간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 복지와 재정의 지속 가능성, 노동과 기업의 조화, 미·중·일 전략 경쟁 속에서 한국이 차지해야 할 좌표 같은 문제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서는 이러한 방향 제시가 보이지 않는다. 개별 사안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반복되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연결된 적은 없다. 정책은 단속되고, 사건은 처리되지만, 미래를 향한 설계도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정책 역량의 부족이라기보다,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는 단죄의 기술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말하지 않는다. 방향 없는 정치는 결국 판단의 반복으로 소모되고, 국정은 관리의 수준에 머문다. 이것이 정책 비전 부재가 지도자 결격 사유가 되는 이유다.
넷째, 자기만의 성공 서사가 없다.
서울법대-사법시험-검사라는 경로는 법조계에서 특별하지 않다. 이는 수많은 법조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전형적 코스일 뿐, 한 개인의 고유한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해 주지 않는다. 시험 합격과 조직 내 승진은 능력의 증명일 수는 있어도, 국민의 삶과 감정을 연결하는 정치적 서사가 되기는 어렵다.
정치는 스펙의 경쟁이 아니라 서사의 경쟁이다. 대중은 완벽한 이력보다 실패를 견디고 다시 일어선 과정을 통해 지도자를 신뢰한다. 좌절을 겪고, 책임을 지고, 그 책임의 무게 속에서 성찰한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감과 설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그런 정치적 내구성을 증명할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위기를 통과한 흔적도, 패배를 감당한 기억도 없다. 이는 단지 스토리의 빈곤이 아니라, 권력을 잃었을 때 버틸 수 있는 지도자적 체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섯째, 그의 부상(浮上)은 정상적인 정치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벼락출세였다.
정치는 선거를 통해 검증되고, 지역을 통해 단련되며, 당내 신뢰의 축적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치의 기본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적도, 지역의 이해와 갈등을 책임져 본 경험도, 당내에서 장기간 신뢰를 쌓은 시간도 없이 곧바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 경로는 명확하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라는 서로 다른 두 권력 아래에서 그는 일관되게 '행동대장'으로 기능했다. 이는 정치인의 성장 서사가 아니라, '권력에 봉사한 기술자'의 이동 경로에 가깝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그의 위치는 유지됐고, 권력의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그는 정치적 책임의 전면이 아니라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런 방식의 부상은 지도자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들 뿐이다.
여섯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그는 사법적 판단의 집행자가 아니라 정치적 결과를 설계한 수사 축으로 기능했다.
이 과정에서 동원된 '경제공동체'라는 논리는 법리의 정교한 확장이 아니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수사 프레임에 가까웠다. 이는 형사법의 원칙을 넓힌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형벌 논리를 종속시킨 사례였다.
그 결과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보수우파는 지도부와 도덕적 정당성을 동시에 상실했고, 정치 세력으로서의 연속성마저 붕괴됐다.
그럼에도 그는 이 과정에서의 역할과 그로 인해 초래된 정치적 파국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거나 성찰한 적이 없다. 법적 무죄와 정치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는, 그가 여전히 정치인이 아니라 수사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일곱째, 그는 그 폐허 위에서 다시 떠올랐고, 국정의 부담이 커지자 가장 먼저 거리를 뒀다.
박근혜 탄핵 이후 보수 정치가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였다. 그는 국정 운영의 최전선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로 기능하며 권력의 성립과 초기 안착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국정의 부담이 커지고 정치적 비용이 누적되자, 그는 책임의 전면이 아니라 거리 두기의 위치를 선택했다.
비상계엄 국면에서 드러난 태도는 노선 차이나 원칙적 이견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국정의 결과를 함께 감당하려는 정치적 동지의 모습이 아니라, 위험이 커지는 순간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자기 생존의 판단에 가깝다.
모든 결정의 과정에는 참여했지만, 그 결정이 초래한 결과의 무게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 이는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검사 모델이 위기 국면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 행동 방식이다.
지도자는 성공의 공로뿐 아니라 실패의 책임도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권력을 함께 사용한 동반자의 것이 아니라, 결과를 관리하려는 관찰자의 태도였다.
여덟째, 그의 정치는 잔머리와 팬덤 의존에 기댄다.
정책과 비전의 경쟁 대신 '한동훈 대 반한동훈'이라는 감정적 대립 구도가 정치의 중심에 놓였다. 이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지지층을 확장하기보다 결집시키는 데 초점을 둔 정치 방식의 결과다.
팬덤은 복잡한 정책 논쟁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환원하고, 비판을 토론이 아니라 배신으로 규정한다. 그 결과 정치는 설득과 연합의 공간이 아니라, 충성 경쟁의 장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국정은 응원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팬덤은 동원을 가능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을 연결하는 연합 정치는 만들지 못한다. 더구나 팬덤에 의존한 지도자는 지지층의 감정에 포획되기 쉽고, 불편한 진실이나 고통스러운 선택을 회피하게 된다.
이는 중도 확장을 가로막고, 정치의 유연성을 마비시킨다. 지도자가 팬덤을 관리하지 못하고 팬덤에 기대는 순간, 정치는 국가 운영이 아니라 감정의 소모전으로 전락한다.
아홉째,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사고 구조다.
그는 말로는 합리와 법치,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지만, 실제 정치적 선택의 순간에서는 계산과 자기 생존이 먼저 작동한다. 원칙은 기준이 아니라 도구가 되고, 상황에 따라 적용 여부가 달라진다. 이러한 이중성은 일관된 가치관의 부재라기보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조정하는 사고 구조에서 비롯된다.
지도자는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동료는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책임을 나눌 수 있고, 국민은 불확실한 미래를 맡길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언제 원칙이 작동하고 언제 계산이 우선할지 알기 어렵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지도자는 위기 국면에서 가장 큰 리스크가 된다. 국정은 개인의 판단 실험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가 남기는 불안은 정책의 실패보다도, 원칙이 언제든 접힐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있다. 이는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래서 결론은 냉정하다. 정치검사 모델은 윤석열과 황교안의 처절한 실패로 이미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한동훈은 그 마지막 전형에 가깝다.
한동훈은 정치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인신공격도 감정적 배척도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가 더 이상 실험의 장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보수의 재건은 또 다른 정치검사의 벼락출세로 이뤄지지 않는다. 덕을 갖추고, 고난의 서사를 통과했으며, 내부 비판을 껴안고 팬덤이 아닌 연합을 설계할 수 있는 정치인만이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다.
한동훈의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그가 상징하는 정치검사식 벼락출세, 책임 회피, 팬덤 의존, 이중적 사고와 결별하지 않는 한 보수는 다시 설 수 없다. 정치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지만, 그것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한동훈은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의 조건을 끝내 증명하지 못했다. 이제는 무대를 내려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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