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암(?)'에 직면했던 이병태 교수의 진지한 '죽음' 탐구

자신의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2026-01-10     김선래 기자

[최보식의언론=이병태 카이스트 명예교수]

모바일 액션 게임 '죽음의 그림자 2'(Shadow of Death 2)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죽음을 자주 접한다.

최근에도 IBM 부활의 거장 거스트너, 국민배우 안성기의 죽음, 그리고 스타들의 자살 소식을 접한다. 폭력으로 대량 학살 되는 무고한 죽음이 스크린을 채운다. 상가에 가서 우리는 고인들을 애도한다.

나는 10대에 할머니, 40대에 아버님 죽음도 맞이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타인의 죽음은 사회의 의식 속에 일상적으로 그저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2025년 4월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한 한 달 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는 국힘당 대선 후보 선출의 경쟁이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던 때고 나는 정책총괄본부장이란 커다란 감투를 쓰고 여의도라는 어색한 공간으로 출근해서 밤 늦게 까지 주말도 없는 일정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사타구니 주변으로 발열과 가려움증이 시작되더니 진물과 함께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동네 피부과 전문의를 찾았더니 습진이 아니고 희귀 피부암이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아보라며 의뢰서를 써준다. 의사의 눈에 불쌍하다는 연민의 감정이 분명하게 읽혔다.

며칠 후 강남의 더 큰 피부전문 병원에서의 진단도 일치했다. 남성에게는 잘 없고 우리나라에는 드물다는 유방외 파제트병(Extramammary Paget's Disease, EMPD)이라는 희귀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하지만 습진 등으로 알고 지내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덧붙여서 나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동생의 혈액암 투병시 경험으로 미국의 암센터 자료부터 나의 검색은 나의 증상이 이 병의 증상과 일치하고,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는 피부에만 국한되면 치료가 그래도 가능하지만 전이가 되었을 때는 생존율이 매우 낮았다. 치료는 광범위한 피부를 도려내고 입원 기간도 아주 길고 수술 후 재발율도 30-60%이 되는 악성암처럼 읽혔다.

운 좋은 삶으로 알고 살아온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으로 느껴졌다. 가족들은 미국에 있고 '독거 노인'의 말 못하는 불안과 번민은 깊어 갔다.

첫번째 드는 생각은 나의 죽음보다, 어머님 보다 먼저 죽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었다. 사실 내 동생이 혈액암과 뇌종양 수술을 할 때도 나는 그런 걱정을 했었다. 제발 어머님보다 앞서 죽지는 말아다오라는 기원을 헀었다. 다행히 동생은 혈액암을 잘 극복했고, 의사가 뇌종양 암이라던 뇌종양은 수술후 조직검사에서 암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어머님 곁에서 효도를 하고 있다.

아마 내 죽음을 가장 견디기 어렵게 슬퍼할 한 사람이 어머님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내가 죽음이 멀지 않을 수도 있을 수 있다는 상황을 맞았을 때 필연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몸에 갇혀 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영원의 세계로 가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이 기독교에 의해 수용되면서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해 인류는 수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려왔다. 하지만 영생의 기본이 되는 육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의 존재가 부정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러서다.

17세기만 해도 천재 블레즈 파스칼은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통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확률적으로 안전한 베팅이라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논리는 "무한한 보상(천국)에 비하면 현생의 희생은 0에 수렴한다"는 수학적 계산에 기초한다.

신을 믿는 것은 현생에 작은 불편 (희생)이지만 신을 믿지 않고 생후에 지옥에 가는 것은 영원한 저주이니, 확신은 없으니 신을 믿는 것이 확률적으로 크게 남는 장사라는 주장이다. 영생의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의 축복과 저주가 신에 달려 있으니 신을 믿는 것의 기대수익이 무한대가 된다. 우리 수명은 무한의 영생에 비하면 아무 가치도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영혼의 존재는 19세기 후반부터 부정되어 왔다. 영혼의 존재나 이원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현대의 뇌과학, 진화생물학, 인지심리학 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나는 많은 과학적 발견 중에서도 신의 존재 (종교)에 가장 치명적인 지식은 바로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의 존재가 부정'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진화론, 양자역학, 상대성 원리, DNA 유전자의 발견 등 신학적 기반을 흔드는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지난 200여년간 축적되었지만 신의 존재를 가장 근본적으로 흔들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부정하기 힘든 것은 바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발견이고 그래서 영생을 믿는 종교에 가장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1848년 보고된 뇌손상의 피니어스 게이지 사건은 뇌의 전두엽을 다친 후 성격이 완전히 변해버린 사례 등을 통해, '마음'이나 '인격(영혼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것)'이 뇌라는 물질에 종속되어 있음이 드러났고 인간만의 영혼의 선물로 여겼던 언어 또한 1861년 뇌의 특정 부위(브로카 영역)가 손상되면 언어 능력을 잃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정신 기능이 뇌의 물리적 작용임이 입증되기 시작했고, 우을증과 같은 '정신'병이 사실은 뇌의 호르몬 균형이 깨어진 결과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발견으로부터 1988년 프로작(Prozac, 항우울제)이 발매되면서 정신병은 육체의 병으로 탈바꿈했다. 20세기 신경과학와 인지과학의 확립으로 영혼의 존립 기반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결과 생명체에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힘(생기, vital force)이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과거의 생기론(Vitalism)은 부정되었다.

나는 이미 영혼은 인간의 뇌가 기형적으로 발전하면서 생긴 메타 인지 능력의 착각이라는 과학의 지식을 수용하고 있었다. 영혼이 없으면 영생도 없다. 마침 이 이슈를 철저하고 파고든 Corliss Lamont의 '영생의 환상(The Illusion of the Immortality)'라는 책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이제 죽음을 생각하면서 영혼이 없고, 그래서 영생과 사후의 존재가 없다는 냉혹한 일회성 삶의 실존주의 철학적 현실을 수용해야 했다.

영혼이 없다면 영생이나 사후 삶은 없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영생을 살 것처럼 살아간다. 남아 있는 시간이 아주 긴 미래인양 그렇게 산다. 하지만 죽음을 예상하고 영생이 없으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돌연 짧아진다.

나는 그 터널의 끝을 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직면했다.

경제학에서 자원의 가치는 희소성과 비례한다. 시간의 가치가 돌연 인플레이션을 한다. 한 순간 순간이 아쉽고 소중하기 이를 때 없다.

사실 시간의 희소성과 가치를 생각하면 파스칼의 내기나 기독교의 천국 영생은 매우 치명적인 역설이 발생한다.

경제학적으로 공급이 무한대가 되면 가격(가치)은 0으로 수렴한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는 순간(혹은 그런 망상에 빠지면), 현재의 삶은 '무가치'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령 태국의 성매매에 팔리는 소년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내세에 환생에서 보상될 것이기에 부모가 팔아서 태국의 퇴폐 마시지 업소에서 성매매의 노예가 된 것을 수용한다.

파스칼의 논리는 "무한한 보상(천국)에 비하면 현생의 희생은 0에 수렴한다"는 수학적 계산에 기초한다. 하지만 영혼이 없으니 영생이 없다고 생각하고 희소성이 가치를 만든다는 관점은 파스칼의 내기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다.

파스칼의 보상의 가치는 전복된다. 파스칼은 [영생 = 무한한 행복(+∞)]으로 가정했다. 파스칼의 시간의 기대값= 무한대 x 영생 또는 신이 있을 확률로 확률이 0보다 크면 무조건 무한대가 된다.

하지만 영생은 시간이 무한하므로, 가치가 0이되고 파스칼은 우리가 '영원한 지루함' 혹은 '무가치한 인플레이션 상태'에 베팅하라고 유혹하는 셈이다. 희소성 관점에서 천국은 낙원이 아니라, 의미가 소멸된 진공 상태다.

우리는 영생의 천국에서 왜 기쁠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천국에서도 시간이 무한대라면 과연 영혼은 행복할 것인가?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우리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하자. 계절의 변화가 그렇게 아름다울까? 헤어짐이 없는 가족이 그렇게 매번 애틋함을 느낄 수 있을까? 천국은 마냥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시간 속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해 보지 않는다.

사실은 행복이란 것은 우리의 즐거운 감각과 그 기억이다. 육체가 없는 영혼이 행복을 '느끼는' 일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육체가 없는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Carliss Lamont의 '영생의 망상' 책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죽음 이후의 영생은 결국 어떤 형태든 육체가 있어야 가능한 개념이고 이 문제를 고민한 신학자들도 그 점에서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영생이라면 시간의 가치가 무의미해지고, 영생이 없다면 우리가 "거는 돈(Stake)이 '푼돈'이 아니라 '전재산'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가장 큰 함정은 우리가 내기에 거는 '현생의 삶'을 아주 하찮은 것(Finite Loss)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만약 신이 없어서 우리가 내기에 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현생의 몇 십년 쾌락을 희생했을 뿐이니 잃을 게 별로 없다"는 가정이다. 만약 영생이 없고 이 삶이 유일하다면, 이 삶은 '유한한 푼돈'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전 우주이자 유일한 기회이자 전자산(Total Asset)'이다.

영생이 없다면 파스칼의 조언대로 헛된 영생을 좇느라 유일한 삶을 두려움 속에 낭비했다면, 그것은 '작은 손해'가 아니라 '100%의 파산'이다. 가장 희소한 자원(유일한 삶)을 존재하지 않는 자원(영생)과 맞바꾼 최악의 투자가 된다.

영생이 없다고 믿고, 또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천국이라면 행복을 느낄 수도 없고, 시간의 가치가 0이 되니 그저 무의미한 영원한 지루함의 존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영생이 없다는 현대 과학을 믿고, 내가 가진 것은 망상의 사후 세계가 아니라 의사의 최종 진단에 따라서는 끝이 보일 수도 있는 아주 유한한 시간의 자산 분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파스칼의 내기는 현재를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파스칼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보험금을 타기 위해(지옥을 피하기 위해)' 믿는 척해야 해야 한다. 보험 사기꾼의 심리다. 하지만 전지하다는 신이 우리가 믿는 척 하는 것에 속아줄 리도 없다. 그러니 파스칼의 내기 논리는 전도에도 도움이 안되는 헛소리다.

현재의 삶이 천국행 티켓을 따기 위한 '대합실'이나 '시험장'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대합실에 갔을 때, 떠나는 기차는 없다. 내세의 무한한 시간을 확보하려는 욕심 때문에, 정작 손에 쥐고 있는 확실하고 희소한 '오늘'이라는 보석을 진흙탕에 던져버리게 된다.

영생을 생각할 때, 시간의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 어떤 것도 "지금 할 필요가 없다" (Procrastination). 남은 시간이 무한하다면, 오늘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도, 오늘 사과할 필요도, 오늘 열정을 불태울 필요도 없다. 100년 뒤에 해도 되고, 1000년 뒤에 해도 된다.

삶은 영원한 '유예(Deferral)' 상태에 빠진다. 모든 결단과 실행은 무기한 연기되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기인 '절박함(Urgency)'이 거세된다. 결과적으로 영생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천국에서 내가 할 기쁜 일, 성취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불멸(The Immortal'은 영생이 축복이 아닌 저주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불사(不死)의 존재들은 동굴 속에 웅크려 앉아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천 년을 살면서 이미 모든 것을 겪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겪게 된다면,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나 운명은 사라진다. 내가 쓴 시를 1000년 뒤에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쓸 수 있다면, 창작의 의미도 사라진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이 된다.

슬픔도, 기쁨도 '끝'이 있기에 강렬하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모든 감정은 지루함(Ennui)이라는 거대한 늪으로 수렴한다. 그래서 소설 속의 불멸의 혈거인들은 말을 잃게 된다.

종교적으로 '내세의 영생'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나타나는 현상심리학적 부작용은 '현재'의 가치 절하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 뿐이고, 진짜 삶은 죽음 이후에 영원히 펼쳐진다"는 믿음이 강해지면,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삶을 하찮게 여겨진다. 현생의 행복을 죄악시하거나, 영생을 위한 '투자금' 정도로만 취급하여 현재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니체가 기독교를 '반(反)생명적'이라고 비판한 핵심 논리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세인(그냥 남들처럼 사는 사람)'의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Authentic Self)'를 찾는다고 주장했다. 영생을 믿는다는 것은 이 '죽음의 자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지면, 삶은 형태를 잃어버린 액체처럼 퍼져버린다. 마감 시간이 없는 원고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죽음은 삶의 '조미료'가 아니라 '방부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 끝나버리고 말 '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음이야말로 삶이 부패(지루함)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방부제이자,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 조건이다.

나는 매일 저녁 병 걱정을 하며 영생의 망상을 거부하기를 다짐했다.

"희소성이 가치를 만든다"는 관점을 가장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고전이 바로 코리스 라몬트(Corliss Lamont)의 저서 '영생의 환상(The Illusion of Immortality)'이다. 나는 이 책을 2024년 연말에 구입한 것이 나에게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종교적, 철학적 '영생(내세)'의 개념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삶이 아름다워진다"는 '인본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한 일회성 삶의 의미를 정교하게 확인 시켜준다.

(1) 환상의 비용: "다른 세상을 꿈꾸느라 이 세상을 낭비한다"

라몬트는 영생이라는 환상이 공짜가 아니며, 치러야 할 막대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사후 세계의 영원한 행복에 집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문제 해결에 소홀해진다. 세상의 일보다 '내 영혼의 구원'이 우선 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라몬트는 영생 신앙이 인류가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에너지를 다른 곳(존재하지 않는 내세)으로 새어 나가게 만드는 '구멍'이라고 비판한다.

(2) 의미의 원천: "끝이 있기에 완성도 있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통찰은 죽음을 허무가 아닌 '예술적 완성'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라몬트는 삶을 예술 작품에 비유한다. 교향곡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영원히 연주되지 않고 '마지막 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캔버스라는 '제한된 틀(Frame)'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교향곡이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Noise)이자 고문이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찍혀야 비로소 한 인간의 삶은 하나의 완성된 서사로 의미를 갖게 된다.

(3) 육체와 정신의 불가분성: "망상을 걷어내라"

라몬트는 과학적 관점에서 '육체 없는 정신(영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생각, 감정, 기억은 뇌와 신경계의 작용이다. 육체가 소멸하면 정신도 소멸한다. 이를 부정하고 영생을 믿는 것은 유치한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이 차가운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는 대신,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인 '생물학적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영생은 삶의 가치를 무한히 희석시키는 인플레이션이다. 반면,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된 자원임을 깨닫게 하여, 매 순간을 보석처럼 빛나게 만드는 희소성의 보증수표다."

영생을 거부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이 삶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삶의 유일무이함과 긴장감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 내리는 지적인 결단입니다.

나는 남은 시간의 자산이 유한하다고 인식한 사람들의 현명한 대처가 무엇인지 찾아 보았다. 아마도 무엇인가 생각할 주제가 생기면 연구물부터 찾는 직업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시간의 희소성과 삶의 가치, 현명하게 죽는 법에 대한 검색들을 했다.

남은 시간이 짧으면 "시간의 희소성(Time Scarcity)"은 증가한다. 경제학적 원리는 희소성이 바로 가치다. 우리가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시간의 희소성은 증폭한다.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남은 수명에 대한 지각(Perceived Life Expectancy)'이 동기 부여를 바꾼다는 관점에서 깊이 있게 연구되어 있었다.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 (SST)은 이 분야의 '바이블'과 같은 이론으로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Laura Carstensen) 주창했다.

그의 팀이 주도한 이 연구는 노화와 감정 처리 방식의 변화를 신경과학적 입증했다. 이 연구 팀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사용하여 젋은 성인(18~29세)과 노인(70~90세) 그룹에게 긍정적, 부정적, 중립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뇌의 편도체(Amygdala) 활성화를 관찰했다. 편도체(Amygdala)는 감정(특히 공포, 불안 등 생존과 직결된 감정)을 처리하고 기억하는 핵심 부위다.

관찰 결과 노인의 뇌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볼 때는 젊은이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활발한 활성화를 보이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볼 때: 편도체의 반응이 현저히 줄어들거나 억제되는 것이 관찰된 것이다.

노인의 뇌는 감정 처리 능력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정보를 거르고 긍정적인 정보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도록 재설계된 것처럼 작동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뇌가 노화되어서"가 아니라, 동기(Motivation)의 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Socioemotional Selectivity Theory, SST)으로 정립했다.

젊은이: 남은 인생이 길다고 느끼기 때문에, 불쾌하더라도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지식 습득 목표)에 집중한다.

노인은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한 보상보다는 '지금 당장의 정서적 만족'을 최우선으로 둔다.

연구 결과 (노화의 역설): 실제로는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일상에서 더 높은 수준의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을 느낀다. 이는 뇌가 긍정적인 것에 더 집중하도록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고, 정서적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뇌가 전략적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인간의 동기는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느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청년기는 시간이 무한하다고 느끼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가치를 둔다. 고생을 사서 하는 새로운 지식 습득, 낯선 사람과의 네트워킹 등 '지식 획득' 목표가 우선한다.

노년기는 시간이 유한하다고 느끼니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현재의 감정적 만족'에 가치를 두고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등 '정서적 의미'가 있는 관계에 집중한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끝이 보인다'는 인식이 시간을 아껴 쓰게 만들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게(선택과 집중) 만든다는 것이다.

시간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뇌과학적, 심리적 변화가 긍정적 효과로 기운다. 노년층은 부정적인 정보보다 긍정적인 정보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남은 시간이 짧기 때문에(희소성), 굳이 부정적인 감정이나 불쾌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젊은이들은 늙으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행복은 U자 곡선 (U-Bend of Happiness)을 그린다. 노년에 만족도가 올라간다. 경제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인생의 행복도는 20대에서 시작해 40~50대에 바닥(중년의 위기)을 치고, 60대 이후 다시 급격히 상승하여 U자 형태를 그린다.

죽음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시간의 희소성 증가), "더 이상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기대치를 낮추고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행복도가 올라가는 것이다.

당연히 노년기가 되면 '돈'보다 '시간'의 가치를 압도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행동 변화가 나타난다.

젊을 때는 돈을 아끼기 위해 시간을 쓰지만 (예: 최저가 검색, 먼 거리 이동) 나이가 들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기꺼이 돈을 쓴다 (예: 직항 비행기, 가사 도우미, 줄 서지 않는 프리미엄 서비스).

이는 남은 시간의 재고(Stock)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단위 시간당 가치(Price)가 폭등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제적 행동이다. 이를 '시간의 그림자 가격(Shadow Price of Time)'이 상승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면 시간의 희소성 때문에 단순히 "아깝다"는 느낌을 넘어, 인간을 더 지혜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적응 기제로 작용한다고 본다.

나이든 사람들의 지혜로운 삶은 아래와 같이 관찰된다고 한다.

-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남은 시간의 양이 줄어들면, 삶의 질(감정적 만족)을 최우선으로 둔다.

- 가지치기 (Pruning):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나 일을 과감히 잘라낸다.

- 현재 중심성 (Present Hedonism):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지금의 행복을 선택한다.

결국 "인생은 짧다"는 인식은 남은 시간을 가장 '밀도' 있게 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관찰된 현명하게 늙는 분들의 모습이다.

나의 병이 피부과 의원의 예상대로이고 조직검사결과 생존율이 낮고 재발율도 높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기대 수명을 크게 늘리지 못한다면 암치료로 고통을 연장하면 인생을 허비하기보다는 가치가 아주 높은 시간을 가장 만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사들의 냉정한 판단에 따라서는 과학이 아니라 욕심에 근거한 치료 대신에 남은 삶을 나의 서사를 더 풍요롭게 그리고 죽음으로 '완성'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극단의 희소성으로 가치가 하이퍼플레이션으로 치솟은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것이 완성의 길로 가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하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일 것이고, 내가 소풍온 행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은 생각이 우선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갔다는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무슨 일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남은 시간에 따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다 걸러지고 남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내가 떠날때 고맙거나 애처롭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이별의 시간을 갖자,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 많이 가슴에 담아 보며 태어나서 살아간 시간을 기쁘게 생각하자. 부정적이고 쓸데없는 것으로부터 도망치자.

윤통의 의정 갈등의 결과로 대학병원 예약도 쉽지 않았지만 어렵사리 예약을 했다. 그런데 예약 날이 가까워지자 돌연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가 증상이 호전되면 암이 아니라고 했기에 기대를 갔고 대학병원엘 갔다.

그곳의 의사의 소견도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었고 확인을 위한 조직 검사도 몇일 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심하던 증상은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뭔가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알 수 없다. 단지 고통스런 당장의 죽음의 걱정은 사라졌지만 삶의 한시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만은 남았다.

대학병원 진료에서 암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을 듣던 날이 홍준표 후보가 경선에서 떨어져 최종 경선에 진출을 실패한 그날이었다.

나는 정치의 미련과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내려 놓은 날이었다. 어께와 마음을 짓누르던 바위 덩어리들이 사라진 날이었다.

나는 바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러 일본의 이시가키 섬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떠났다. 바다 속의 세상과 섬은 이전의 여행들에 비해 천만배 더 아름다웠다. 같이 하는 일행들도 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사실, 이 경험은 내가 이후 대선 캠프이 요청을 수락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은 인생이 길지 않은데 세상을 위해 한번 더 일할 보너스 기회를 주는 가보다. 누구의 세평이 뭐가 중요한가. 내가 있어서 세상이 모래알 하나 만큼이라도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족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 질환이 가져왔던 공포와 불안의 시간은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죽음과 남은 한시적 자산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서 죽음에서 완성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그 자세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오늘도 내 남은 생의 하루를 사용했다. 남은 시간의 희소성과 가치는 또 그만큼 높아졌다. 이 귀한 자산 쓸데없는 고민으로 낭비하지 말자를 매일 되새긴다. 그것이 2025년 내가 64년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생각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지식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뼈에 새기는 것은 다르다.

내가 뼈에 새긴 것은 이것이다.

인생은 아주 유한하다.

그 유한함에서 우리는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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