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기 옛터’, 장충단 한복판에 들어선 것은?

역사에 무지한 서울시의 장충단공원 정비 작업

2026-01-07     박묘숙 기자

[최보식의언론=신성대 논설위원, 박묘숙 기자]

자료사진

임진왜란이 끝나자 피난 중 왕을 호위했던 무사들로 왕의 경호를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바로 무예청(武藝廳)이다.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와 같은 것으로 훈련도감의 별기군(別技軍) 군사들 중 무예에 출중한 자들을 선발했는데 가히 조선 최고의 무사들이라 할 수 있겠다. 

별기군은 반드시 조선의 국기인 무예십팔기 전 종목을 습득하고 특히 그 중 본국검(本國劍)과 월도(月刀)를 장기로 능했는데 때로는 각 군영에 무예교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무예청 군사를 무예별감(武藝別監, 줄여서 武監)이라 불렀다. 그들은 궁궐문과 왕의 거소를 지키며 왕의 행차 시 왕의 거마를 둘러싸고 호위를 전담했는데 반차도에 붉은 철릭에 노란 전립을 쓰고 요도(腰刀)를 찬 무사들이 그들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 보면 지금의 낙선재 앞마당 위치에 무예통감의 숙소와 무기고, 훈련하던 무단(武壇)이 보인다. 왕은 종종 창경궁 뒤 언덕 춘당대에서 그들의 무예를 직접 시험하곤 했었다. 당연히 무감들의 위세도 대단해서 신윤복의 그림에 주막에서 행패를 부리는 광경도 나온다.

‘십팔기(十八技)’는 조선 선조에서 시작하여 사도세자가 완성시킨, 그러니까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에서 만든 국가의 무예’로서 정조가 명명(命名)한 조선국기의 고유명사이다. 

'무예도보통지' 자료사진

현재 십팔기는 필자의 신청으로 ‘전통군영무예’란 별도의 명칭으로 서울시무형문화제 제51호로 종목 지정되어 있으며, 그 교본인 ‘무예도보통지’는 2017년 북한에서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켜 놓았다.

목판본. 4권 4책. 규장각 도서.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白東修) 등에게 명령하여 작업하게 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 간행된 《무예신보(武藝新譜)》의 내용을 합하고 새로운 훈련종목을 더한 후 이용에 편리한 체제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정조대에 조선의 문화가 종합 정리되는 과정에서 《병학통(兵學通)》 《병학지남(兵學指南)》 《군려대성(軍旅大成)》 《삼군총고(三軍摠攷)》 등의 군사서적들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다른 군사서적들이 전략·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임에 비해 이 책은 전투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라는 특징을 지닌다. 

앞머리에 정조의 서문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이래 전투 기술의 대강과 한교 등 이 책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들의 간단한 전기와 관계 사실들, 인용서목 등을 담았다. 본문의 권1에는 장창(長槍)·죽장창·기창(旗槍)·당파(鏜鈀)·기창(騎槍)·낭선(狼筅), 권2에 쌍수도(雙手刀)·예도(銳刀)·왜검(倭劍), 권3에 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쌍검·마상쌍검(馬上雙劍)·월도(月刀)·마상월도(馬上月刀)·협도(挾刀) 및 등패(藤牌)의 요도(腰刀)와 표창(標槍), 권4에 권법(拳法)·곤봉·편곤(鞭棍)·마상편곤(馬上鞭棍)·격구(擊球)·마상재(馬上才) 등 총 24가지의 기술이 수록되어 있다. 

각 항목마다 병기와 개별동작 및 전체 움직임에 대해 각기 매우 사실적인 그림과 해설을 붙였다. 말미에는 의복에 대한 해설과 그림, 그리고 각 부대별 차이점을 담았다. 이것과는 별도로 언해본도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는데, 개별동작의 해설부분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이들도 그 내용을 암기하고 그림을 보며 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하였다.

조선 때 한양의 남산 복록(지금의 예장동, 필동, 장충동)은 모두 군영지였다. 현재의 한옥마을은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이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왜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왜성대’로 불리던 곳이다. 장충단공원에는 금위영의 분영인 남별영이 있었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藝場洞)은 예술을 하던 곳이 아니라,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던 훈련장이라는 뜻이다. 훈련도감 별기군들이 봄‧여름‧가을에는 비파정(지금의 동국대학교 중앙 교정)에서, 겨울에는 하도감(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훈련을 했는데, 자신의 아들을 대년군에 넣어 일찍부터 무예십팔기를 익히게 해서 대를 잇게 하였다.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무예를 익히지 않고는 십팔기 전 종목을 습득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산의 국립극장 뒤편의 유서 깊은 민간 활터인 석호정(石虎亭)에는 1956년에 만들어진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라는 제목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남산 정비사업 때 재차 이전한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전반부 내용이 다음과 같다.

‘漢陽의 南木覓山下에  石虎亭이 있으니 卽多士習藝의 場이라 李朝初로부터 三藝를 講習하여 其才를 試選하니다. 此에서 由出이라 本亭刱建歷代는 未詳이오나 獎忠壇後麓에 十八技舊址가 있어서 檀紀四二三0年 光武元年丁酉七月之望에 有志諸賢이 協助努力하여 是亭을 創建하고...’ 

광무원년인 단기 4230년(1897)에 장충단 뒷쪽 기슭에 ‘십팔기옛터(十八技舊址)’가 있어 그 곳에 석호정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장충단은 광무4년(1900)에 옛 남소영(南小營) 터에 설치되었다.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으로 실제 어영군의 주둔지였으며 모화관(慕華館)과 더불어 무과초시(武科初試)를 자주 치렀던 장소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십팔기옛터’란 남소영의 연무장(鍊武場)을 말하며 일제에 의해 조선군대가 해체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그곳을 ‘십팔기옛터’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장충단공원에는 ‘十八技舊地’라는 표지석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에 무지한 탓인지 서울시는 장충단공원을 정비하면서 이런 역사적 흔적을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며칠 전 장충단 공원에 들렀더니 한복판 남별영 자리에 ‘house’라는 간판을 단 한옥카페가 들어서 있어 어이없고 씁쓸했었다. 일제가 하던 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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