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의 사고뭉치] 당신은 그날의 선택지를 실제로 검토해봤나

. 공동체의 확신 앞에서 질문할 수 있는 용기

2025-12-20     서재원 객원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서재원 객원논설위원]

MBC 뉴스 캡처

한국 사회의 역사 논쟁은 언제나 과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 온도와 달리, 논쟁의 깊이는 놀랄 만큼 얕다.

광주 5·18, 제주 4·3과 같은 사건들은 반복적으로 호출되지만, 질문은 거의 새로워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토론은 입장의 충돌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사고는 집단의 확신 속으로 흡수된다.

문제는 역사 왜곡 그 자체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미 이해했다고 믿게 만드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 교과서, 기념식, 미디어, 정치적 언어를 통해 제공되는 서사는 반복되며, 그 반복은 이해의 착각을 낳는다. 이해는 더 이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증표가 된다. 이렇게 형성된 기억은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질문은 무지가 되고, 무지는 도덕적 결함처럼 취급된다.

이 지점에서 ‘민주화’라는 단어는 설명이 아니라 사고를 종결시키는 기호가 된다. 많은 한국인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이미 알고 있는 사건”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날의 선택지를 실제로 검토해본 적은 드물다. 

총성이 울리는 거리에서 어떤 판단이 가능했는지, 공포가 이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어떤 윤리적 대가를 요구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그 대신, 사건은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제공된다. 이 서사는 도덕적으로 명료하며 정치적으로 안전하다. 문제는 이 명료함이 사고를 대신해 준다는 점이다.

비슷한 구조는 최근 논란이 된 제주 4·3 국가유공자 취소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이 사안은 개인의 구체적 행위와 생존 조건을 검토하기보다, 사건 전체를 하나의 상징적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국가는 행정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시민사회는 도덕적 구호로 대응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개인이다. 선택의 맥락, 강요된 충성, 생존을 위한 타협은 서사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이러한 배제는 악의의 산물이기보다 사고의 편의성에서 비롯된다. 복잡한 현실을 견디기보다, 이미 합의된 이해에 몸을 맡기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이 경향을 강화해왔다. ‘비판적 사고’를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사고만을 허용한다. 시험은 이해를 측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가 요구하는 이해를 내면화했는지를 확인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 결과, 개인은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집단이 승인한 사고를 반복한다.

이 구조 속에서 집단사고는 안전하다. 다수의 확신에 기대는 순간, 개인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이 안전함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 대한 취약성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위기는 언제나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과거의 재난을 “이미 경험했다”고 믿는 사회는 새로운 재난 앞에서 무력해진다. 익숙한 언어와 과거의 교훈은 새로운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 틈에서 혼란은 증폭된다. 이미 안다고 믿는 순간, 관찰은 멈추고 판단은 자동화된다.

독립적인 개인이란 공동체를 부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제공하는 이해를 잠정적인 것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로마에 가서 로마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질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조차 경험하지 못한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것은 고립이 아니라, 거리 두기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필요한 용기는 올바른 편을 고르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멈춰 서는 용기, 그리고 공동체의 확신 앞에서 질문을 유보하지 않는 태도다.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진정한 성숙은 합의된 결론의 반복이 아니라, 결론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끝까지 검토하는 데서 시작된다.

다음 재난은 과거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기억의 양이 아니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지 않는 개인만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세계 앞에서 사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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