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박진경 대령은 제주 부임 한달만에 남로당 계열 부하에게 암살됐나

파월 사령관 채명신의 ‘양민 보호’는 어디서 왔나…제주 4·3과 박진경 지휘의 숨은 연속성

2025-12-18     최보식

[최보식의언론=김요셉 기독교한국 대표(평택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제주방송 캡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제주 4.3사건 당시 남로당 토벌작전 공로로 1948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한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결정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제주 양민 학살자라는 이유에서 였다. (편집자)

박진경 대령이 제주에 부임한 것은 1948년 5월 초, 4·3 사태가 본격적인 무장 반란의 성격을 띠며 확산되던 시점이었다.

관련 증언과 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무장대의 즉각적 섬멸보다는 입산 주민의 하산 유도, 선무 활동, 그리고 무장세력과 양민의 분리를 작전의 중요한 축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기간에 눈에 띄는 군사적 ‘성과’를 내기 어렵고, 지휘관에게는 정치적·군사적 부담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남로당의 ‘물과 고기’ 구조를 붕괴시키는 방향의 접근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정황 자료 중 하나가 박진경 대령 재임 기간 중 보고된 체포·검거 규모다.

자료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수천 명에 이르는 주민·연계자가 체포된 것으로 보고된다. 사망자 수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십명 수준으로 집계된 통계들이 존재한다.

이 수치는  제주 4·3 전체의 피해 규모를 설명해 주는 지표는 아니지만, 박진경이 지휘하던 초기 국면의 작전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짧은 기간에 대규모 체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작전의 중심이 무장대 섬멸이나 대량 사살에 있었다기보다, 입산자·연계자·의심 대상에 대한 광범위한 선별과 분리, 즉 주민을 무장세력의 통제망에서 떼어 내는 방향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한다. 체포 규모에 비해 사망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 역시, 폭력이 전면화된 ‘초토화형’ 작전과는 다른 접근이 시도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것이 박진경의 작전이 도덕적으로 무결했다거나, 강제력·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체포 자체가 이미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공포의 경험이었고, 이후의 구금·심문 과정에서의 가혹 행위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다만 반군 조직의 전략 논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대량 사살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대량 체포와 분리가 반군에 치명적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남로당 무장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작전 방향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혁명 전략의 토대를 허무는 위협이었다. 무장대가 주민을 강제로 산에 묶어 두고 ‘해방구’를 유지하려는 상황에서, 국군이 주민 하산과 보호를 병행하며 “국가 권력 아래서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 조직의 강제력과 선전력은 동시에 약화된다. 이는 내부 이탈과 동요를 촉발하고, 장기적으로는 무장대의 고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박진경 대령의 암살을 단순히 ‘정부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반군의 응징’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력이 떨어진다.

남로당은 역사적으로 “가장 잔혹한 상대를 우선 암살했다”는 식의 일률적인 패턴을 보여 준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공산혁명과 게릴라 운동의 일반적 패턴에서 보듯, 조직의 존립 구조와 장기 전략을 위협하는 인물, 다시 말해 주민 통제와 분리 전략을 흔드는 지휘관을 제거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남로당의 제주 관련 문건에서 박진경이 ‘대내 반동의 거두’로 지목되고, 연대 내부의 남로당 계열 장교·하사관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점은, 그가 단순히 ‘잔혹했기 때문에’ 제거되었다기보다, 장기적인 전략 환경을 위협하는 위험한 지휘관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박진경의 재임 기간이 불과 한 달 남짓이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제주 전역에 걸친 ‘초토화 작전 체제’를 완성했다거나, 구조적 폭압 체계를 전면화했다고 보기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다.

반면 남로당이 그를 비교적 이른 시점에 제거한 것은, 그의 지휘 방향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조기에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암살은 이미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 예상되는 전략적 손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선제적 선택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박진경 대령은 남로당에게 있어 가혹한 적이라기보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는 적에 가까웠다.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하고, 강제 일변도가 아니라 보호·회유·선무를 통해 주민을 되돌리려는 접근은, 남로당 제주 무장투쟁이 의존하던 생태계를 근본에서부터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 요소였다.

공산주의 반군의 입장에서 볼 때, 극단적 폭력을 자행하는 적대 세력은 단기적으로는 치명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자신들의 희생을 도덕적 자본으로 전환시켜 주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반면 주민을 보호하고 분리하는 지휘관은, 그 ‘희생의 서사’ 자체를 성립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박진경 대령의 죽음은 단순한 가해–피해의 도식으로 환원되기보다는, 국군 초창기 대반군 작전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는 분명 재임 기간 동안 다수의 체포와 강제력이 행사된 작전의 책임자였으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고통 역시 가볍게 취급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남로당에 의해 정치·군사적 표적 암살을 당한 연대장이었고,, 훗날 채명신의 베트남전 ‘양민 보호·분리 원칙’으로 이어지는 대게릴라 작전교리의 초기 형태를 실험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전에서 제시한 작전 모토와 원칙은, 그가 국군 초창기 대()게릴라 작전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이 재구성·체계화된 결과로 볼 여지가 크다.

특히 채명신 장군의 핵심 작전 원칙인 ‘양민 보호’와 ‘민간인–게릴라 분리’ 사고는, 1948년 제주 4·3 사건 초기 국면에서 상관이었던 박진경 대령의 지휘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이러한 연속성을 사료적 정황 속에서 검토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채명신은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베트콩 100명을 놓치더라도 양민 1명을 보호하라”는 지침을 작전의 제1원칙으로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모토는 그의 회고록과 언론 인터뷰, 부하 장교들의 증언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며, 베트콩과 주민의 관계를 ‘물과 고기’에 비유하고, 게릴라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주민과 분리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이에 따라 그는 대민 선무, 심리전, 주민 보호를 단순한 부수 활동이 아니라 작전의 핵심 요소로 위치시켰고, 그것은 매우 효과적인 대게릴라전의 원칙임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사고가 형성된 배경을 추적할 때 주목할 지점은 채명신의 초기 군 경력, 특히 제주 4·3 시기의 경험이다. 채명신은 1948년 4월 통위부 소속 장교로 제주 9연대에 부임해 소대장으로 근무했으며, 곧 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박진경 중령(후에 대령)의 지휘 아래 4·3 사건 진압 초기 작전에 참여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와 관련 연구, 그리고 채명신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박진경은 무장대 토벌 자체보다 입산한 주민을 하산시키고, 무장세력과 주민을 분리하는 데 작전의 초점을 두려 했던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즉, 군사적 승부를 ‘섬멸’이 아니라 ‘분리와 회수’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채명신이 목도한 현실은, 남로당 계열 무장세력이 주민을 산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물과 고기’의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유지·확장하는 구조였다.

박진경은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 작전의 중심을 주민 하산 유도, 선무 활동, 양민 보호에 두고 무장대와 민간인을 분리하려는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험은 채명신에게 대게릴라전의 핵심이 단순한 무력 사용이 아니라, 주민을 누가 통제하고 보호하느냐의 문제라는 즉 민심의 확보라는 것을 각인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박진경 대령에 대한 평가는 이 지점에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는 1948년 5월 초 제주에 부임한 지 약 한 달 만에, 연대 내 남로당 계열 장교·하사관들이 주도한 암살로 피살되었다.

박진경 대령에 대한 평가는 검증되지 않은 단선적 ‘학살자’ 프레임을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 국군 초창기 대게릴라 작전 사상 형성 과정 속에서 그의 지휘 철학과 한계를 함께 검토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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