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한 거지소년을 살인자로 만든 형사반장
부모는 누군지도 모르구요. 고아원에서 컸어요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감옥에 오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줄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정의 낡은 형광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모는 누군지도 모르구요. 고아원에서 컸어요. 아홉 살 때 추운 겨울날 고아원 담을 넘어 도망쳤죠. 거지가 됐어요. 청계천 3가 고가도로 기둥 밑에 리어커들 줄세워 놓는 데 있잖아요? 그 틈새가 내 집이었죠. 트럭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먼지가 수북했어요.
겨울이면 깡통 들고 나가서 얻어 온 얼어 붙은 밥 하고 김치를 불기가 남은 버려진 연탄에 데워, 거지 형들과 함께 먹었어요. 그때 후암동 쪽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어요. 가끔 거기로 원정을 가서 구걸 했어요. 천 원짜리 지폐를 얻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 때면 봉래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봤는데 정말 좋았죠. 어둠 속 의자에 앉아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거기가 천국이었어요. 보통은 극장 담 넘어 들어가 공짜로 보곤 했는데 돈이 생긴 날은 20원을 주고 표를 사서 으스대면서 동시상영 영화를 봤어요."
순간 그는 과거로 돌아간 듯 흐뭇한 표정이었다. 단단하게 걸렸던 마음 문의 빗장이 풀린 것 같았다. 갇혔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동 창녀촌 포주 딸 미진이를 좋아했는데 그 애하고 도망가서 몇 달 살았어요. 미진이가 훔친 엄마 돈으로 여인숙에서 있었는데 따뜻한 방바닥, 옆에서 자던 미진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정말 행복했어요. 나중에는 포주인 장모를 위해서 손님을 끌고 오는 삐끼 노릇도 해줬죠."
그의 눈빛이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 것 같았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어떤 내용이죠?"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과거의 기억을 침착하게 꺼내는 듯한 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수시로 변하는 눈빛을 더 믿는 편이다. 입보다 눈이 더 정직했다.
"그러니까 16년 전 무지하게 덥던 여름날이었어요. 내가 거지 아이들하고 한강 고수부지로 놀러갔죠. 그런데 거기서 노는 건달 아이들이 몰려와서 시비를 걸었어요. 두 패로 나뉘어 다구리 싸움이 붙었죠. 그런데 그쪽 패 중 한 명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 순경이 나를 잡고 참고인 진술을 하고 가라는 거예요. 그냥 상황을 말해주고 가면 된댔어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죠. 내가 죽인 게 아니니까요. 내가 본 대로 말했죠. 바로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저는 같이 싸웠던 거지 아이들과 같이 본서로 넘겨졌어요. 강력계 형사들이 내 눈빛을 보더니 말없이 주먹을 날리는 거예요. 시멘트 바닥에 엎어졌는데 구두발이 머리를 찍어 눌렀어요. 입속에 피가 가득하더라구요.
내가 범인인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저도 매 맞는 데는 이골이 나서 그 정도 터지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형사들이 한참 동안 나를 두들겨 패다가 나중에는 내가 살인범이 아닌 걸 느끼는 눈빛이었어요. 형사반장이 말했어요. 범인 아닌 걸 알았으니까 가라구요.
억울했죠. 그때 길거리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어요. 사람들이 신문에 나는 걸 무서워 한다구요. 그래서 내가 나가면 기자한테 다 불어버릴 거라고 했죠. 나만 터진 게 아니라 같이 있던 거지 아이들도 떡이 되도록 맞았거든요. 그랬더니 형사반장이 나를 달랬어요. 앞으로 5년간 우리가 사고 쳐도 자기 관내에서는 봐줄 테니까 가만 있으라고 했어요.
거기서 제가 물러서지 않고 또 까불었어요. 그랬더니 형사반장이 알겠다고 하고 나간 후, 형사 세 명이 들어오는데 눈에서 퍼런 불이 일어나는 게 정말 사람이 아니고 저승사자더라구요.
결국 전 거의 시체가 될 정도로 터지고 살인범이 됐어요. 어느새 형사들이 다른 아이들을 시켜 내가 살인하는 걸 봤다고 하는 엉터리 조서를 다 꾸며 놨더라구요. 아이들이 머뭇거리면 단번에 뒷통수를 갈기면서 몰아치면 애들이 찔끔해서 그렇다고 말했어요.
형사들이 제 팔을 잡아 비틀어서 조서에 손도장을 찍더라구요. 죽은 남자 애가 제 애인을 좋아했는데 내가 청산가리로 죽이려고 했다가 안 되니까 한강물에 빠뜨려 죽었다는 게 형사들이 조작한 내용이었어요. 내가 자백을 한 셈이 되고 함께 있던 목격자들이 다 증언을 한 셈이죠. 그렇게 저는 살인자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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