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일대기 [Eunsik Joo]
2016년 6월에 올린 글인데 8월 18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하여 답사했던 글을 재등재합니다.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산소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까닭
드라마 모래시계의 음울한 주제가가 러시아 노래 “벨라야 쥬라블(백학)”에서 차용한 것은 대부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백학이라는 노래는 전장터에 나간 병사가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백학으로 변 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고 싶은심정을 표현한 시에 작곡을 붙여 노래화 한 것이다. 유해는 비록 이국멀리 떨어져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여천 홍범도 장군의 혼과 이름은 백학처럼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 해군의 잠수함 명칭으로 최근에 다시 부활 했고 흉상도 국방부현관 오른쪽에 전시되었다.
일제시대 항일무장 투쟁과 운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들어 서 잘안다. 하지만 여천 홍범도 장군의 산소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시립공동 묘지에 쓸쓸히 잠들 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왜 홍범도 장군의 산소가 카자흐스탄에 있는가? 여기에는 일제시대 민족의 수난사가 얽혀 있다. 카자흐스탄 체류중 이던 2014년에 홍범도 장군의 산소에 집사람과 같이 참배하였다. 알마티에서 기차로 이동시간만 왕복 46시간이 꼬박 걸렸다.
홍범도 장군은 한국인 중 초지일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끝내 조국 광복을 보지못하고
1943년 쓸쓸히 순국하였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빨치산 활동을 통해 일제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하여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 현장은 그의 산소를 보고난 뒤에 거꾸로 2015년 7월 달에 찾아갔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추적하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에 가장 큰 항일 무장독립 투쟁을 들라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인데 그 두 전투에 모두 참전한 장수는 홍범도 장군뿐이다.
그는 이념보다 당시의 현실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및 공산진영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 김일성이 허울로 자랑하는 1937년의 파출소 습격과 비적질을 벌인 보천보사건 과는 상대가 안된다. 김일성의 공적을 내세우는 북한도 상대적으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폄하하였고 민족 진영에서는 연유야 어찌되었던 레닌과 만나고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하여 외면하였기에 그동안 남북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지만 최근에야 재조명된 비운의 독립투사였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가 없었다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가 빈약하고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가 취약 하게 보였을 것임에도 그동안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사 에서 배척되었던 이유는 무엇이 었던가? 그것은 홍범도 장군이 자유 시 참변으로 독립군 진영이 초토화 되었 음에도 불구 레닌을 만나 선물과 은전을 받고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던 바 ‘우등 불’을 쓴 철기 이범석 장군이 자신의 공을 다소 높이고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평가 절하하였던 데에도 일부 기인하고 빨치산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했다.
홍범도 장군이 봉오 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정규군을 격파하자 1920년 일제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만주지역 거주 동포들이 더 이상 독립 운동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경신참변이라는 대학살극을 일으켜 만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 3500명이 몰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독립군 섬멸작전을 전개 하였다. 독립 운동을 계속하고자 일제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가 소련의 내전이 종식되자 입장을 바꾼 소련 정권의 배신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후 독립군은 연해주 밀산으로 돌아왔다.
동포들이 참상을 겪은 후 근거지를 상실하여 더 이상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홍범도는 개간 운동을 펼쳐 토지를 개간하여 힘을 길러 비축하고자 하였으나 소련 정부의 정책변화로 피땀흘려 개간한 토지를 전부 빼앗겼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팽창을 우려한 소련은 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극동지역에서 한인들의 스파이 활동을 우려하여 37년 10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다. 이때 스탈린은 124 대의 열차를 동원하여 가축운반과 화물운반 차에 동포들을 짐짝처럼 싣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11월의 혹한에 근한달 이동 간 노인과 어린이 15,000여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졌고 죽은 사람은 열차밖 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37년 8월 21일 소중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고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인민위원회는 극동 불라디보스톡 거주 한인 강제이주 결정을 내렸 는데 “극동 지방 국경부근 구역 고려인 거주민 이주 시키는 문제에 대하 여” 라는 결의문 No 1428-326 명령서
12개 조항을 발표 했다. 2~3일 내로 갑자기 이동준비 하라는 황당한 명령에 동포들은 망연자실했다. 열차이동간에 화장실이 없어 이질에 걸리고 차가 역에 정차하면 용변을 해결하느라 역 주변은 온통 용변 오물로 넘쳐났으며 나중에는 할 수없이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차하였다고 전해온다.
사전에 민족지도자와 지식인, 그리고 이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사 2800명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에 7만 6천명, 카자흐스탄에9만 5천명이 분산 배치 되었다. 홍범도 장군도 재혼 했던 가족과 같이 처음 카자흐스탄 사르다리아강 근처 잘 아르이크 마을에 갔다가 이듬해 4월 초에 크질오르다로 이주 했다. 소련 정부의 한국말 사용금지와 거주 이전의 제한등 고려인 학대정책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려인들은 토굴과 움막을 짓고 정착해 살았다. 고려인들은 사막을 개간하여 벼농사등 농작물을 심었다. 그들이 모여 살던 곳은카레이스키 콜호즈(한인 집단 농장) 이라고 불리었다. 얼마나 억척 스러웠는가 하면 소련시절 노력영웅 이 200명 가운데 120명이 고려인이 었다.
홍범도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소전쟁 터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고령으로 거부되었고 생활이 어렵자 고려극장 연출가 태장춘이 찾아와 연금만으로 생활이 어려우니 비교적 힘들지 않은 극장 수위로 생계에 보탬이 되는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 처음 에는 ‘의병들’이라는 극을 상영하였는데 나중에 ‘홍범도’라고 극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때 크질오르다 산체프나야거리 2번지에 있는 자택에서 직업혁명가는 숨을 거두었다. 이후 그의 집이 있던 거리는 홍범도거리로 재명명 되었고 지금도 그렇 게 불리운다.
본인이 크질오르다를 찾았을 때 홍범도 장군의 묘지는 풀이 무성하여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왜 관리를 안하느냐고 물으니 묘지 관리비가 자기에게 안 주어지고 다른 사람이 관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500텡게를 주고 풀이나 잘 관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로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와 보훈처에 묘지관리 관련하여 체계를 바로 잡아주도록 부탁했다.
카자흐스탄 우슈 토베와 크질오르다에 정주했던 동포들은 초기 도착시 토굴을 파고 핍박과 절망, 죽음으로 얼룩진 짐승같은 생활을 했다. 지금은 흩어져 카자흐스탄 각지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 우리 민족이 옮겨갈 때 그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토종씨앗과 볍씨를 챙겨갔던 동포들은 삶의 터전 을 가꾸어 뿌리를 내렸고 오히려 국내 에서 멸종된 씨앗을 구하려 국립원예 기술연구소에서 카자흐스탄쪽으로 토종 씨앗을 구하려 수차례 공무원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기 도 했다.
현재의 우슈토베 부근 부슈토베 최초 정착지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동포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변하였다. 우리 정부에서는 대사관을 통하여 초기 한인정착과정 에서 빵과 이불을 주고 도움을 준 현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온실을 지어주었고 원예 작물을 키울 수 있는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홍범도장군 순국 70주년을 맞아 기념 세미나를 알마 티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나는 알마티 에서330키로 이격된 부슈토베를 일부러 두 번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곳은 원동(극동) 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나라 잃은 동포들의 고단한 삶과 기댈 곳 없었던 당시의 황망 함을 생각할 때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