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살인범을 변호하는 변호사
악역 배우와 악인은 다른 것 아닌가요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정신분열증인 남자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전과도 없고 착한 성품이었다. 살인의 동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영화계에서 천재성이 있다고 소문이 난 감독이었다. 그의 장인 역시 이름이 알려진 드라마 제작자였다.
법정에서 한참 변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방청석에서 한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가 있는 법대 앞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 그 따위로 말하면 안 돼. 지금 정신병으로 빠져 나가려는 거잖아?"
원한이 사무친 아버지의 심정을 고려한 재판장은 말리지 않았다. 나는 살인범을 대신해서 흠뻑 저주를 받았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험한 얼굴을 한 대여섯 명의 남자가 나를 붙잡고 구석으로 갔다.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오기 직전이었다.
"살인범 새끼를 두둔하는 이런 놈은 맞아야 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여성의 아버지와 함께 온 직장 부하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대장격인 죽은 여성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법정에서 제가 맡은 역을 했을 뿐입니다. 드라마 제작자이신데 악역 배우와 악인은 다른 것 아닌가요?"
순간 그들의 눈빛이 멈칫했다. 그리고 나는 맞지 않았다.
또 다른 살인범을 변호하는 항소심 법정이었다. 담당 재판장은 법조인 사이에서 평이 좋지 않았다. 선입견이 강해 재판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왕 같은 판사라고 했다. 내가 변론에서 우발적인 범행을 얘기할 때였다. 살인범은 동기가 정상 참작에서 중요했다.
"말하지 마세요. 우발범은 살인범이 아닌가? 변론이 영 탐탁치가 않아."
재판장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 말을 막았다. 법대 위의 판사들이 나를 내려다 보는 눈길이 냉소적이었다. 모멸감이 들었다. 재판장은 더 따질 필요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나는 재판장의 "영 탐탁치가 않아"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속이 그렇다 하더라도 판사가 법정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살인범도 재판절차라는 의식을 통해 처벌하는 게 민주국가였다. 나는 수첩을 꺼내 재판장의 말을 메모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변호인 지금 뭘 쓰고 있죠? 재판의 진행 과정을 기록하는 법원의 공판조서를 신뢰하지 않습니까?"
"탐탁하지 않으시다고 하시는데 뭐가 그런지 알아보려고 메모하고 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법원의 언덕길을 내려올 때였다. 옆에 있는 나를 선임한 살인범의 형에게 물었다.
"변호사인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였습니까?"
"재판장에게 미운털이 가득 박힌 것 같았습니다."
"변호사를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겁니다."
나는 재판장에게 미운털이 박힌 게 나인지 아니면 살인범에 대한 증오가 내게 투사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나는 수 많은 범죄인의 변호를 해왔다. 절도범을 변호할 때 사람들의 눈길을 보면 어느새 내가 절도범이 되어 있었다. 폭력범을 변호할 때는 내가 폭력범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재판이라는 연극에서 나는 악역을 맡고 증오와 멸시의 눈길을 받아 왔다. 그게 나의 직업이었다. 한 원로 법관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판사라는 게 참 옹졸한 직업이야. 법정 안에서는 내가 왕이야. 틀려도 인정하기 싫고 말이야. 버티는 변호사를 보면 밉고 언제든 복수하고 싶은 앙심을 먹게 돼. 범죄인들의 행위가 대리인인 변호사에게 투사되는 경우도 많아. 그럴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워서 그 변호사의 입을 막곤 했지."
그런 판사도 이해가 갔다. 각자 역할이 다른 것이다. 성경을 보면 성에 들어왔다가 멀쩡하게 잡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인물이 나온다.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나 역시 남들의 냉소나 경멸의 눈초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변호사 생활을 마감하면서 바둑을 복기하듯 돌이켜 보면 그런 것들은 나를 성장시키고 나의 영혼을 다시 닦아 주었다. 남이 욕먹을 때 같이 욕을 먹어주고 맞을 때 같이 맞아주고 그렇게 십자가를 같이 져주는 것도 괜찮았던 것 같다.
#살인자변호인, #엄상익변호사, #엄상익에세이, #엄상익못다한이야기, #많이두들겨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