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 호소한다'...러시아 황제도 계엄을!
개방보다 탄압으로 통치하였고 그것은 가장 쉬운 수단
[최보식의언론=강평기 러시아 전문가('표트르 대제의 개혁' 저자)]
1881년 3월 1일, 러시아 제국의 수도에서 폭탄이 터졌다. 황제 암살이었다. 무려 열 번이나 황제에 대한 테러 시도가 있었다. 심지어 황제가 거처하는 겨울 궁전에서 폭탄이 터져 백여 명이 부상하기도 했다.
농노를 해방하고 지방자치제와 사법 개혁(배심원제 도입)을 시도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시행하던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주의자들에게 죽자, 제국은 공포 사회가 되었다.
화가 레핀이 그린 '이반 4세와 아들' 작품이 이 공포 사회를 표현한 것이다.
알렉산드르 2세를 보필했던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황제가 죽기 전에 승인한, 도시와 지방의 협의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새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스승이자 신성종무원장인 포베도노스체프(1827~1907)는 반대했다.
그는 전통론자로 법과 질서, 정교회를 중시했으며 이단, 즉 개신교를 근절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교육과 국내 문제뿐 아니라 외교정책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에게 교육의 목적은 신앙과 도덕, 그리고 황제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관제 민족주의자와 범슬라브주의자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새 황제는 대관식도 하기 전에 포고령을 공포했는데, '전제정의 불가침성에 관한 선언문'이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는, 알렉산드르 3세, 전 러시아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 폴란드의 차르, 핀란드의 대공, 기타 등등.
우리의 모든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 선포한다.
신의 헤아릴 수 없는 섭리 안에서, 우리의 사랑받는 아버지(알렉산드르 2세)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순교자의 죽음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신의 뜻이었으며, 우리에게는 전제 군주의 통치라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하셨다….
공포와 혼란에 짓눌려 있는 우리의 충직한 신민들, 조국을 사랑하고 세대에서 세대로 황실 권위에 충성해 온 이들, 모두는 용기를 내야 한다.
황제의 권위 아래, 그리고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결속 안에서, 우리의 땅은 여러 차례의 큰 혼란을 견뎌냈고, 극심한 시련과 재난 속에서도 힘과 영광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조율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우리가 이 위대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며, 우리 모든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 호소한다.
황제 폐하와 국가를 신앙과 진실로 섬기라:
- 러시아의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반역 행위의 근절을 위해,
- 신앙과 도덕을 확립하기 위해,
- 자녀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 부정과 착취의 척결을 위해,
-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자 러시아의 은인이 베풀어 주신 제도들의 실행에 있어 질서와 정의의 정착을 위해.
본 문서는 그리스도 탄생 후 1881년 4월 29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위 1년에 반포되었노라. 알렉산드르.>
포고령은 황제의 신성한 권력을 인정하고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사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 신문에는 유대인이 황제를 살해했다고 비난한 기사가 실렸으며, 피할 수 없는 대량 학살(포그롬) 시작되었다.
군중은 동요했으며 수많은 유대인 정착지와 재산을 파괴했다. 군과 경찰, 지방 수장은 폭도들을 제어하지 않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며 때때로 조장하기도 했다. 이 박해를 '남쪽의 폭풍'이라고 불렀다.
키이우를 비롯하여 러시아의 남쪽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대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포그롬은 1년간 지속되었으며 200여만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포베도노스체프는 이런 말을 했다.
"러시아의 유대인 문제는 러시아계 유대인의 3분의 1이 정교회로 개종하고, 3분의 1은 다른 나라로 이주하였으며, 나머지 3분의 1이 죽음으로써 해결되었다."
제국은 '전제정의 불가침성에 관한' 포고령을 선포했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질서와 안정'이 필요했다.
드디어 1881년 8월 14일 '국가 질서와 사회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규정(계엄령)'을 내무부 장관이자 범슬라브주의자 이그나티예프가 작성하여 각료회의 승인을 받고 황제가 공포했다.
이 규정으로 제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패망할 때까지 무려 36년간 비상계엄과 전시 상태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계엄령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계엄은 어떤 절차로 공포되었고 어떤 조치들이 취해졌을까.
제국의 법령집을 보면, 계엄문건은 총 36조로 되어 있으며 강화된 경비 상태(준계엄)와 비상 경비 상태(계엄)로 구별했다.
내무부 장관은 특정 지역의 주민들을 심각한 불안 상태로 빠트리는 위협이 있을 시, 즉각적인 질서 회복을 위해 특별 조치가 필요할 경우, 각료회의 규정에 따라 황제의 최종 재가를 받은 후 계엄을 선포했다.
준계엄 시 총독, 주지사와 시장은 질서와 안전 유지에 대한 책임을 졌으며, 강제 규정을 명령하고 위반할 경우, 최대 3개월 구금과 최대 500루블의 벌금을 부과했다.
도시의 모든 공공 모임, 사회적 모임, 심지어 사적 모임까지 금지하고, 상업 및 산업 시설을 즉시 폐쇄하고, 특정 인물에 대해 주거지 제한과 추방(원칙 3년)할 수 있었다.
더욱이 죄인들은 군사 법원에서 비공개로 재판을 받았다. 군 형법 279조에 따라 당국에 저항하거나 군인, 경찰관, 모든 공무원을 공격한 자, 심각한 피해를 주거나, 방화를 저지른 경우도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예외 없이 모든 건물과 공장은 항시 수색할 수 있었고 재산을 압류할 수 있었다.
계엄령 지역에서는 준계엄 조치를 포함하여 최대 3개월 구금 또는 3,000루블의 벌금, 선출직 해임, 지방의회의 중단 또는 폐쇄, 정기 간행물 발행 중단, 최소 1개월간 교육 기관 폐쇄 등의 조치를 취했다.
준계엄은 1년, 계엄은 6개월이 지나면 연장할 수 있었는데 계속 연장했다.
1906년 러시아 제국은 87개 주 중 40개 주는 전시 상태였고, 27개 주가 계엄 상태, 15개 주는 준계엄 상태였다.
이렇게 제국의 말기에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었고, 수색과 체포, 감금, 추방 등 탄압의 시대였다. 군사재판이 곳곳에 있었으니 제국의 신민들은 늘 불안했다. 지식인과 혁명가도.
계엄령 지역의 총독, 주지사, 시장, 사령관 등은 계속해서 계엄을 원했고, 그것은 통치에 더 유용했다. 정부 역시 개방보다 탄압으로 통치하였고 그것은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제국을 세운 표트르 대제는 이복 누이의 권력 쟁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개인 신상에 대한 테러를 입지 않았다. 대제는 늘 선원과 공장 근로자, 병사,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부하들과 함께 자기도 하였음에도.
하지만 제국의 말기에는 테러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온 사회가 공포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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