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 코끼리가 살았던 '창경원' 벚꽃놀이 85년사

1909년 11월 1일 오전 10시 개원식에는 1,000명의 축하객이 참석

2025-04-09     박묘숙 기자

[최보식의언론=전집현 작가]

전집현 SNS 캡처

*과거에는 벚꽃 놀이로 창경궁과 진해 군항제가 유명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전국 지자체마다 다투어 벚꽃을 심기 시작해 4월이면 방방곡곡이 온통 벚꽃 천지가 됐다. 올해 벚꽃은 작년에 비해 빛깔이 선명하지 않고 흐린 것 같다.(편집자)

창경궁(昌慶宮)은 1418년 왕에 등극한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을 시초로 하고 있다. 

그 후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문정전·통명전 등의 건물을 더 짓고 나서 이름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정궁이라기보다는 임금(세조, 예종)과 사별한 왕비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는데, 전염병이나 전란 등의 국가 비상사태 시 왕이 임시로 머무는 피궁의 역할도 겸했다.

숙종 때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고, 영조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요절한 장소이기도 하다.

창경궁은 창건 이래 임진왜란(1592), 이괄의 난(1624), 순조 때 대화재(1830) 등으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복원을 거듭하면서도 궁궐로서의 격과 위상을 지켜왔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순종이 등극하게 되었다. 

순종은 즉위와 더불어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이렇게 되자 졸지에 하릴없는 '창덕궁 전하'로 전락한 신세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 아래 식물원과 동물원을 창덕궁 바로 옆인 창경궁에 설치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궁장·문루 등이 헐리기 시작했다. 

그 후 일제는 대궐 북쪽으로 잇닿은 춘당대 쪽에 식물원을, 종묘와 인접한 보루각 자리에 동물원을 각각 지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1909년 초부터 일제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던 각종 동물과 진귀한 식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동물인 코끼리·사자·원숭이·낙타 등의 희귀 동물과 파초·바나나·고무나무 등의 열대식물도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1일 오전 10시, 연미복 차림의 예복을 입은 순종을 비롯해 문무백관 및 외국 사신들까지 참석한 동식물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개원식에는 무려 1,000명에 달하는 축하객이 참석했다고 한다. 왕실의 정원이 국민을 위한 정원으로 공개된 것이다.

이때 전시된 동물은 포유류 29종과 조류 43종 등 총 72종 361마리였다. 

이로써 창경궁 동물원은 19세기 이래 설립된 동물원 가운데 36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7번째로 문을 연 동물원이 되었다.

당시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으며, 개원 첫해의 관람객 수만 1만 5,000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1만 명에 달했다.

1945년 7월 일본 패전 직전 폭격으로 우리가 파손될 경우 맹수들이 탈출하여 사람들을 해칠 것이 우려되자, 창경원 담당 사토는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을 모두 죽이라고 직원에게 지령을 내렸다.

직원들은 사료에 독을 넣어 호랑이, 코끼리, 악어 등 21종 38마리를 독살했다.

당시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 창경원 일대에 메아리쳤다고 한다.

이렇게 동물원의 동물을 죽이는 조치는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져서 

지금도 도쿄에 있는 우에노동물원에는 그 당시 죽은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954년 이 동물원이 다시 개장했다. 기업들이 돈을 모아 태국에서 코끼리를 사오는 등 동물로 채웠다.

그러면서 창경원은 1970년대까지 줄곧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창경원의 벚꽃놀이가 특히 유명했다. 

1984년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일본인이 심어 놓았던 벚나무도 베거나 일부는 여의도 윤중로에 옮겨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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