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자선냄비에 거액을 넣고 사라진 '스크루지' 같았던 노인
살아오는 동안 항상 새 차, 새 아파트, 새로운 일 같은 것을 찾았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오래 전 신문에서 따뜻한 느낌이 드는 작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싸늘한 바람이 부는 명동거리에서 사랑의 종을 치면서 모금을 하는 구세군이 있었다. 그 앞으로 낡은 외투를 걸친 노인이 와서 슬며시 봉투 하나를 자선냄비 속에 넣고 갔다. 그 봉투 속에는 일 억이 넘는 자기앞 수표가 들어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자선냄비에 거액을 넣고 사라진 그 노인의 삶을 우연히 추적한 적이 있다. 그는 디킨즈의 소설 스크루지 영감같이 무섭게 돈을 번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미 저 세상으로 건너간 노인의 심경 변화를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노인은 일생 번 돈을 세상에 내던져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 그의 주식을 관리해 주던 증권회사 지점장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굉장히 인색한 분이었어요. 주식에서 손해가 나면 저를 엄청나게 혼을 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큰돈을 세상에 내놓고 가는 걸 보고 사람은 변할 수 있구나 생각했죠."
무엇이 그 노인의 가치관을 갑자기 180도 변화시켰을까.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펼쳤다. 어느 날 밤 부자가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는 그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했다. 그 부자는 어른이 엄마의 자궁 속으로 어떻게 다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예수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했다.
다시 태어난다는 건 뭘까. 서너 살의 아기 때부터 변두리 동네에서 같이 세발 자전거를 타며 큰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에도 같이 입학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치열한 중학교 입시경쟁이던 시절 그 친구는 이차 중학교로 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도 그와 거의 매일 하루종일 시간을 같이 지내며 놀았다. 둘이서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술집을 가보기도 했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보이는 그 친구는 대학을 가지 못했고 나는 대학생이 됐다. 그래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한이 서린 목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난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공부만 공부만 할 거야. 그리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나는 그의 쓰라린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시공부를 할 때였다. 산골의 암자로 들어갈 때마다 그 친구는 꼭 내 책 보따리와 간단한 살림을 들어다 주곤 했다. 30대 중반 무렵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것 같이 살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미국으로 가기 직전 한 여성을 소개했다. 둘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비행기를 탔다. 나는 그가 미국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기도했다. 그 후 서로 힘겨운 세상 길을 가느라고 그랬는지 소식이 끊어졌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20대 청년이던 우리는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됐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한 친구가 짤막한 동영상을 보내왔다. 예배 시간 교회의 강단 위에서 성가를 부르는 나이 먹은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겠다고 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 친구였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찬송을 하는 그의 얼굴에 성스러운 빛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새로운 영혼이 되어 가난과 아픔, 눌림에서 해방된 평화로운 노인의 얼굴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항상 새 차, 새 아파트, 새로운 일 같은 것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 한다거나 새로운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하는 세상 속에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50대 무렵 류영모 선생이 쓴 '다석일지'를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솜틀집을 운영하던 류영모 선생이 나이 사십 무렵에 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북한산에 들어가 경전을 읽으며 집필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내 정신세계에 혁명이 일어나 지금까지의 잘못된 존재 방식을 폐기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게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었을까. 용기가 없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매일 죽는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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