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 ... 원로언론인의 사부인곡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당신은 흰 가운 차림이었지요
[최보식의언론=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갔습니다.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때론 같이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한없는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었습니다. 아니 바꿔서는 안 되는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신은 나의 꿈이었습니다. 밤에 꾸는 꿈 말고 낮에 꾸는 꿈 말입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신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에게 부탁하고 약속 했지요. 당신과 결혼하고 늘 내 곁에 있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오늘의 달도, 내일의 태양도 뜨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당신은 흰 가운 차림이었지요. 당신은 해맑은 웃음과 친절한 말씨로 대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당신처럼 착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우리는 전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늘이 맺어준 필연이었습니다
1969년 4월 8일 우리는 부부가 됐습니다. 신혼생활은 꿈만 같았습니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신은 노량진역 앞에서 약국을 경영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의 열매는 딸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등에 업고 약국 일을 했습니다. 당신은 힘이 들어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정이 안정적이니 멋진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언제나 등 뒤에서 한없이 기다리다가 따스한 눈길을 보내주곤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랑의 열매는 아들이었습니다. 당신은 노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고 탈 없이 자라주었지요. 아들이 5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요.
딸은 대학까지 나와 직장에서 사내결혼을 했고 아들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두 녀석들이 부모 속 썩이지 않고 결혼해서 아들딸 낳아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지요. 외손자는 벌써 졸업과 동시에 대그룹의 사원이 되고 친손녀는 대학 4학년이 돼서 언론사 입시 준비를 한답니다.
그때였지요. 5.18 사태가 있었지요. 계엄군의 언론검열이 시작됐습니다. 나는 서울시청에 자리한 군 검열단에 매일 신문 대장을 들고 찾아가 검열 도장을 받아와야 했습니다.
검열관은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들면 신문대장을 마구 잘라냈고 나는 그때마다 항의했습니다.
“당신들이 언론 자유를 아는가? 왜 정론직필 하는 기사를 잘라내는가?”, “뭐 이런 게 있어? 당신 목이 잘리고 싶어?“
그때 당신은 내 눈물을 소리 없이 닦아주었고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군사정부가 오래 못 갈 것이라며 공부하라고 권했습니다.
나는 연대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명지대 대학원에 들어가 5년 만에 석박사가 됐습니다. 당신은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 날 위해 밤새 기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그리움이 된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손 잡아준다고 넘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손 내미는 당신이 고마웠습니다.
응원한다고 삶이 힘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힘내라’는 당신의 그 말 한마디가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살아왔지요. 큰 딸 아이 결혼할 때 당신은 눈물을 보였습니다. 외손자를 얻었을 때도 당신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 다 기쁨의 눈물 같았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유학 갈 때나 군에 입대할 때는 당신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큰 아이 시집갈 땐 흔쾌히 허락하더니 작은 아이 결혼할 때는 성에 안차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음에 늘 감사했고 당신이 내 곁에 함께 있음에 또 감사했지요.
따사롭고 화사한 봄날처럼 당신에겐 멋진 날들이 많았습니다.
서울신문 경찰 기자팀 부부가 강화도로, 서오릉으로 쏘다녔고,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대만 등으로 관광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지요.
아들이 미국 유학 중일 때는 방학 때마다 미국 동부와 서부를 돌았고 캐나다와 하와이도 두 번씩이나 찾아 한 때 이민도 생각했었지요.
당신은 우리 집안에 막내며느리로 들어와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집안을 융성케 해 동네에서 효부 며느리로 칭송 받기도 했지요.
당신은 아이들에게 현모였고 나에게는 양처였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이었고 이웃에겐 착한 아주머니였습니다.
당신은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울 밑에 심은 봉선화 꽃을 따다가 손톱에 물들여주곤 했지요. 손자가 자전거를 배울 때나 연을 날릴 때 지켜보면서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지요.
당신은 손자를 침대에 누이고 자신은 방바닥에 누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지요.
당신은 손자들에게 자신을 ‘할미’라고 부르게 하고 젊어서는 장미꽃이었지만 지금은 ‘할미꽃’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려서 6.25를 겪었고 약대를 나와 약국을 30년이나 경영하다가 60세가 되던 해 약국을 넘기고 집에 들어앉아 손주들만 돌봤지요.
내가 64세에 대장암에 걸려 5년을 투병생활 할 때 지원자가 돼 주었고 이어서 당신이 유방암에 걸려 5년을 고생할 때 내가 지원자가 됐습니다. 우리 둘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마에서 벗어났고 교회를 통해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당신에게 파킨슨병이 찾아왔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으나 순종하면서 살자고 했습니다 ‘할미꽃 당신’이 홀가분하게 고령사회의 청춘을 누려야할 때 하나님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체험할 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와병 중인 당신을 보면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대한언론인회 회장직을 사퇴하고 당신을 하루 종일 간병할까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당신이 절대 사퇴하지 말고 앞으로 1년 정도 남았으니 그대로 소임을 다 하라고 간곡히 당부해서 그대로 있었지요.
당신은 걷지 못하면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니 3년 만에 근육이 다 빠져나가 겨울철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습니다. 당신을 들어 휠체어에 옮길 때나 침대에 눕힐 때마다 속으로 울곤 했습니다. 나 역시 당신처럼 근육이 빠져 10kg이 줄었지요.
당신을 들어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침으로 치료를 하지만 자주 당신을 들어야 하니 침을 맞아도 잘 낫지 않더군요.
당신이 얼마나 버틸는지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다 보면 치료제가 개발돼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믿어보자고 했지요. 얼마 전부터 당신의 말하는 게 어눌해지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대화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요양보호사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택시를 불러 타고 중앙대학교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먼저 와 있더군요 심정지가 오랜 시간 경과돼 심폐 소생시키고 있답니다. 맥이 탁 풀리고 서 있다가 넘어질 뻔 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응급처치를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당신과 나는 올해 초 이럴 때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했지요. 당신이 3일 내 다시 심 정지 현상이 나타나면 서약서대로 결심을 하라고 했답니다.
당신이 뇌사 상태에서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도록 보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주일은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누가 압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지요.
그래도 먼저 가시려거든 나도 같이 데려가 주시오.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시렵니까. 나라도 동행해야 외롭지 않지요. 당신이 가버리고 나면 나는 외로워서 어떻게 지내나요.
텅 빈 안방에서 찬바람이 돌고 당신이 쓰던 물건들에서 당신 모습이 어른거릴 겁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리운 당신 얼굴 어른거리고 당신 생각에 눈물만 흐를 겁니다.
사랑할 수 없는 먼 거리, 마음이 울적해지면 시리도록 하얀 입김이 당신의 그림자 되어 사라질 겁니다. 그리워 그리워서 아무리 외처 봐도 내 텅 빈 가슴에 남아 있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겁니다.
편히 가세요. 천국에 가시거든 이승은 잊어버리세요. 당신은 이제부터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주님 곁에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나도 얼마 있으면 당신 뒤를 따라 갈 것이니 그때 우리 다시 만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하늘나라에서도 당신에게 멋진 오늘이 있고 또 행복한 내일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할미꽃 당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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