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삼류선비] '폐족' 정약용이 서울살이 권유한 이유는?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2024-09-22     윤일원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윤일원 논설위원]

1800년 정조가 죽자, 순조가 11살로 등극한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유사옥으로 남인 청류(산림에 은거했던 경기 인근 남인이 탕평책으로 벼슬을 시작)를 대거 숙청한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영조의 계비가 되었으며 그때 영조는 66세였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은 천주교 탄압이라는 명목 아래 정조 때 큰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은 남인들의 제거가 주목적이었다. 성호 이익을 비롯하여 이들은 기존의 유학이 시대의 변화를 대처할 수 없음을 알고 서학은 물론 경제지학(經濟之學)과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까지 포함하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중농 학파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였으니, 토지 기반 조선 사회에서 이들의 제거야말로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남인 중농 학파였다. 신유사옥이 발생한다. 첫째 형 정약현은 배다른 형이나 그의 맏사위 황사영이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 가고, 바로 위 형인 정약종은 사형을 당했으며, 누이는 이승훈과 혼인하였으며 이승훈이 사형을 당한다.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폐족(廢族)이 된다. 폐족은 사대부로서 명예는 물론 과거시험 볼 자격을 박탈하여 생계를 끊는 가혹한 처벌이다. 양반으로 거세되었으니, 이제 중인이나 평민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란 뜻이다.

강진에 유배된 다산은 아들 학유(學游, 둘째)에게 당부한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느냐?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들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전 국민의 50%에 이를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연암 박지원이 과장(과거 시험장)에 들어선 아들에게 제발 밟혀 죽지만 말고 살아 돌아오기를 당부할 정도였다.

과거 공부는 모범 답안지를 달달 외워야 함은 물론 점점 시대에 맞지 않은 편협함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인구는 늘어났으나 토지는 한정되어 주기적 사화(士禍)를 통해 벼슬자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치열했고, 벼슬길에 올랐다면 한탕 해야 하는 역설도 만들었다. 

"이제 너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 공부로 인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중략) 너야말로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난 것이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가문이 망해 버린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처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영·정조 시대는 변하는 중이었다. 청은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부강해졌으며, 일본은 서양의 대항해에 연결되어 에도(도쿄) 인구가 100만 웃돌 정도로 경제가 호황을 일으키자, 한양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경제의 구조가 바뀌자, 한양을 높이고 시골을 천시하는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자 드디어 다산은 '너희들은 한양 십 리 안에서만 살기를 당부'하는 잔소리의 끝판왕에 이른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만 살게 하겠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다산이 죽은 뒤 16년 만에 조정은 학연(學淵, 첫째)에게 감역(監役:종9품)을 음서(蔭敍, 과거 없이 등용)로 내려 폐족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둘째 학유는 아비의 바람처럼 '농가월령가'를 지어 중농 학파의 명맥을 이었으며, 추사 김정희가 부고를 전할 정도로 인품도 훌륭했다. 그렇지만 다산의 가르침, "서울서 살아라"는 참으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남양주에 있는 다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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