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삼류선비] 고향 친구에게 받은 땅콩 두 포대
어머님 돌아가시고는 도토리묵은커녕 배추 한 잎, 정구지 한 쪽도 못 먹었습니다
[최보식의언론=윤일원 논설위원]
마음이 엄청 부잡니다. 땅콩 두 포대를 깔고 앉아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 없습니다. 일체 손도 못 대게 하고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습니다.
석 달 전 이른 아침 시골서 아는 사람이라며 물어물어 저한테까지 연락이 왔습니다. 내 친구에게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외마디 신음 같은 말만 내뱉고 음주운전 측정기를 안 분다는 겁니다. 그래서 “걱정할 것 없다. 끽 해봐야 면허 취소이니 그게 무예 대소야. 시골 동네만 왔다 갔는데”라며 불어라고 했습니다.
점심 때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습니다. 여전히 "어어아아" 외마디 말만을 하기에 아직도 긴장하고 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퇴근했습니다. 집에 와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 이상하잖아?’ 싶어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전히 "어어아아" 하는 것입니다. 순간 의심이 들었습니다. 안 부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못 하는 거다. 사고의 충격으로 뇌경색이 왔는지, 뇌경색으로 사고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는 119가 출동해도 끝내 병원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번 추석 때 가니 내게 땅콩 두 포대를 줬습니다. 여전히 "어어아아"만 합니다. 걱정이 태산같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원 가기를 거부하니까요.
이게 마지막 고향 음식 같습니다. 동생 부부가 있지만 불성실 농꾼이라 밭농사가 없습니다. 다 사 먹더라고요. 어머님 돌아가시고는 도토리묵은커녕 배추 한 잎, 정구지 한 쪽도 못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콩은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두고두고 먹을 요량입니다. 더구나 그 보기 힘든 자색 땅콩이 아닙니까?
원래 시골서 뭘 갖고 오면 이웃집이라도 주는데 이번 만큼은 베란다에 두고 아무도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의자를 두고 지키고 있습니다. 언감생심! 절대 못 줍니다.
음식은 분명 맛이 아니라 추억이고 기억입니다. 왜 사람들은 추억이 사라지는 것,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맛 때문입니다. 맛이 사라지면 맛 가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어떤 소리일까요?
구양수는 ‘추성부(秋聲賦)’에서 '애처롭기가 전쟁터' 같다고 했습니다. 오싹한 기분이 들어 동자한테 나가보라 하니 "별과 달이 훤합디다. 맑은 하천이 하늘에 걸려 있고, 사방은 쥐 죽은 듯한디,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만 납디다요" 하니 "그렇구나, 내 스스로 나를 들볶아 스스로 병들게 하였구나" 합니다.
가을비는 내릴 때마다 기온이 내려가고, 봄비는 내릴 때마다 기온이 올라갑니다. 저는 오늘 종일 거실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펴 놓고 땅콩을 깔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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