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생] 내가 떠날 때는 바로 이걸 못할 때?
이 오월은 여느 다른 달들과는 달리, 알 수 없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기다려 왔다는 느낌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오늘, 마침내 오월, 그 초하룻날의 아침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마침내 오월'이라고 쓴 것은 이 오월은 여느 다른 달들과는 달리 알 수 없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기다려 왔다는 느낌 때문에 쓴 것이다.
어제는 하루 단식하고 텃밭에 마지막 모종을 내었고 오늘 아침에는 소금물을 마시고 장(腸)의 찌꺼기를 비웠다. 내 나름의 오월 맞이를 하는 셈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한 편의 시상(詩想)을 메모했다. '내 떠날 때'란 제목의 시인데, 이 주제는 오랫동안 이어온 내 시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 오늘 아침에 다시 떠오른 것이다.
단순화하면 '내가 내 곁의 이들에게 더 이상 감사를 드러내지 못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거나 축복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곧 내가 떠날 때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오늘 아침 다시 떠오른 것은 이 오월에는 이번 생의 내 소중한 인연들이 그렇게 앞서 떠났다는 그런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5월 5일은 박경리 선생의 16주기이다.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몇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선생의 사위인 노겸 김 시인과 그분의 지인을 통해 선생의 사후에도 선생의 유택이 모셔진 통영 산소를 거의 해마다 찾아뵙게 되었다. 선생의 유해를 장지에 모시던 날 마지막까지 남아서 묘소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오월이면 다시 떠오르곤 한다.
5월 8일은 노겸 김영일 시인의 2주기이다.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김지하라고 불렸던 그 이름이 묘비에도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시인은 생전에 당신의 이름을 김지하가 아닌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 어둠의 지하에서 벗어나 볕살 좋은 땅 위의 '한송이 환한 꽃'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내가 형님으로 모셨던 그는 특별히 내가 쓴 책의 발문 형식을 빌려 당신의 소망을 간곡히 일렀다. 내가 김 시인을 노겸 형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5월 19일은 우졸당 장태원 형님의 1주기이다, 70년대, 척박하고 암울했던 그 시대에 농민운동의 동지로 만나서 45년을 넘게 도반으로, 형님으로 모시고 함께했던 분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나라, 이 땅의 주요한 현장에 언제나 함께 참여했고 그 주제들에 고민을 함께해 왔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싶다.
그리고 5월 22일은 무위당 선생님의 30주기이다. 이번 생에서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의 스승이라고 고백했던 분이다.
이 분들 모두 이번 생의 고맙고 귀하고 소중한 인연들이다.
아침에 오월에 유명을 달리하신 이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릿하고 따뜻하고 그리워진다.
그래서 아침의 시 메모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그렇게 떠난 뒤/ 마지막 숨결을 멈춘 내 얼굴엔 고요한 미소 한 자락이/ 나를 보낸 이들의 가슴엔/ 따뜻함과 그리움만이 남아있기를//‘
연둣빛으로 싱그럽던 산색이 오월의 아침엔 진초록빛으로 짙어졌다. 오월에 피는 꽃들에 유난히 하얗게 피는 까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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