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삼류선비] 정선 옥산장의 전옥매 할머니
겨우 화단에 몇 송이 꽃이 황량하게 핀 것을 보고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시집와서 앞 못 보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교편 잡은 남편 봉급으로 애들 교육시키기 어려워 별의별 품을 다 팔고, 나중에 여관을 지으며 두 애를 대학까지 보내고, 큰 애는 장가보내 서울에 집도 마련해주는 삶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을 유성기 소리처럼 풀어가는데 그 토막토막에는 사랑, 페이소스, 낭만, 파국, 고뇌, 결단, 실패, 좌절, 용기, 인내… 그리고 행복으로 대하 구비문학을 장장 세 시간 풀어간다.”
누구의 이야기냐고? 세상 모두의 어머니, 강원도 정선 여량(餘糧) 땅 옥산장 전옥매 할머니 이야기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여량으로 갔다. 내가 여량을 알게 된 것은 배우 원빈 때문이고, 원빈을 알게 되자 아우라지 강을 알게 되었고, 아우라지 강을 알게 되자 정선 아리랑을 알게 되었고, 정선 아리랑을 알게 되자 옥산장 전옥매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30여 년 전부터 아우라지 강과는 인연이 있었다. 내 지인을 데리고 간 것도 부지기수, 내 가족을 데리고 간 것도 여러 번, 홀로 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치유의 땅에 들어서면 먼발치라도 옥산장(玉山莊)을 바라보고 할머님의 건강을 빌었다.
여전히 옥산장 주위에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보고 살며시 옥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웬걸, 그 많던 야생화가 어디로 갔지?” 수목원마냥 가득했던 야생화는 사라지고 겨우 화단에 몇 송이 꽃이 황량하게 핀 것을 보고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같이 온 집사람한테 슬그머니, “한번 안으로 들어가 봐, 할머님이 살아 계시는지?” 나는 차마 직접 묻지를 못했다. 집사람이 돌아와서 “안에 계시는데” 하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여쭈었다.
“올해 구순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찾아오신 손님 덕분에 내 이름으로 된 이 땅이 3필지인데 안채는 딸한테 물려줬고 바깥채는 첫째한테 물려주고, 할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시고…”
인사를 여쭙는 내내 한두 번 눈을 마주칠 뿐, 대부분 시간은 먼 산만 바라보는 눈을 볼 때, 어머님 구순 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기억에 가슴 저 밑바닥부터 뭉클한 맘이 샘솟았다.
나는 여태 숨겨 두었던 남인(南人)의 안식처 봉화, 영양, 청송을 이번 추석 연휴 때 답사했다. 청송 객주 김주영 문학관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어 봉화 닭실에서 후진을 양성한 충재 권벌(權橃)을 끝으로 남인의 삶을 잠시 엿보았다.
이들의 삶,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이 두려워 졸본성을 기준으로 강 아래에 수도를 두어 방어했듯이, 이들은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와 다시 낙동강을 건너 깊숙이 산속으로 숨어 마음을 방어했다. 마치 그것은 화석처럼 고스란히 감추어진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같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만난 우연과 필연, 그렇게 해석되어야만 내 마음이 더 즐거우므로. 나는 이른 아침 주실마을을 어슬렁거리다 'cafe 주실'을 발견하고 원두커피를 마시는 젊은 분을 만나 “커피 되나요?” 물었더니, 주인장은 안 계시고 공짜로 커피를 준다고 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차에 이 집안의 할머니를 뵙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친정이 ‘하회’라는 말을 들었고, 방금 이야기 나눈 젊은이가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연희동과 구기동에 산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공간이 좁구나”를 연신 감탄한다.
또 진보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이른 새벽 물안개 핀 주산저수지를 보고 싶어 달려갔더니만, 물안개는 보이지 않고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끼인 채로 살아가는 잉어를 만나, 청송 국립공원관리센터에 신고하니 즉시 조치하겠다고 한다.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제발 다음 생에는 모진 인간을 피해 주산지 용왕이 되어라.”를 빌면서, 먹을 것이 지천으로 있는 지금에 낚시가 금지된 이곳에서 구태여 낚시를 한 인간의 간사함에 혀를 내두를 뿐, 다시 발길을 돌려 두들마을로 향했다. 전날 사진을 확인해 보니 이문열 생가가 빠졌기 때문이다.
처음 왔던 길을 역순으로 다시 두들마을 석간 고택에 들리니 ‘ㅁ’자 집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 좀 찍겠다.” 하니, “어디서 왔어요?” 하고 되묻는다. 서울이지만 고향은 신풍이라 하자, 대뜸 자기의 친고모가 우리 마을 둘째 종가 ‘윤석휘’씨한테 시집갔다고 한다. 언빌리버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고등학교 선배요 아는 지인이 줄줄이 나오니 참으로 우연히 들린 고택에서의 인연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남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계(芝溪) 이재성(李在誠)의 말처럼 “선비가 은거(隱居)한다고 하여 민생 문제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승려일 따름이요, 출사(出仕, 벼슬길에 나아감)한다고 하여 산수 자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노예일 따름이다”라고 한 그 세월은 족히 수백 년이 되어 기왓장에 녹청색 이끼가 잔뜩 서려야 꽃이 핀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