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삼류선비] ‘삼불차(三不借)’로 진검승부를 한 조광조 후손

지식인으로 지켜야 할 것이 그것밖에 없는 한스러움 때문인가

2023-10-02     윤일원 논설위원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난 뚝방길을 따라 걷는다. 파란 하늘에 누런빛 들판 너머 야트막한 산기슭 아래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을의 지세가 배 모양 같다고 하여 동네에 우물이 하나밖에 없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조지훈의 '지조론(志操論)'이다. 그의 강한 올곧은 지적 감성은 어디서 흘러왔을까? 문화는 강물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학식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사람도 강물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모여든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남으로 향하여 봉화 명호를 만나고 청량산 협곡을 지나면 예안(禮安)에서 제법 너른 들을 만들고, 안동에서 반변천과 합류하여 방향을 서쪽으로 튼다. 낙동강 동편에 세 고을 봉화와 영양, 청송이 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다. 남곤(南袞) 등 훈구파가 사림파 조광조(趙光祖) 등을 죽인다. 사림파는 주자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펴고자 하였지만, 아직은 역부족으로 훈구파에게 되치기당한다.

그때 조광조의 일가인 한양조씨 한 무리가 사화를 피해 죽령을 넘어 영주로, 영주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다시 일월산(日月山) 아래 오지 영양으로 스며든다. 그가 주실마을 시조인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6~1632)이다.

봉화의 주산이 청량산이라면, 영양의 주산은 일월산이며, 청송의 주산은 주왕산이다.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일월산은 해발 1,219m로 정상에는 일자봉(日字峰), 월자봉(月字峰) 두 봉우리가 있다. 정상에 서면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볼 수 있으며 안동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반변천(半邊川)의 발원지며, 아직도 무당의 굿당이 즐비한 곳으로 그만큼 오지다.

다산 정약용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한양 십 리 밖을 떠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니” 죽어도 서울에 살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사림의 태두 조광조의 후손은 인적이 드문 오지로 남하하여 '칼날 같은 남인(劍南)'이 되기를 원했고, ‘삼불차(三不借)’로 진검승부를 한다.

첫째, 재불차(財不借)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남에게서 빌리지 말라. 그러면 비굴해진다. 최소 50마지기는 있어야 한다. 팔 수 없는 땅 50마지기, 그 깡촌에서는 제법 너른 땅이다.

둘째, 문불차(文不借)로 어떤 한 일이 있어도 까막눈이 되어 남에게 글을 빌리지 말라. 그리하면 비루해진다. 어릴 때부터 글공부하라. 그래서일까 이 마을 출신에는 문인, 학자가 유독 많으며 박사만 하여도 14명이 된다.

셋째, 인불차(人不借)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절대로 양자를 들이지 말라. 그러면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그 결과 입향조 이래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안면 묵계에 만휴정(晩休亭)이 있다. 만휴정에는 ‘오가무보물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는데, 있다면 오직 청렴결백뿐이다.”라는 뜻으로 조선말 세도정치를 한 장동 안동김씨에 완전 다른 삶을 산 진짜 안동김씨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가훈 또한 이와 비슷하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은 19세 무렵 수원화성 용주사에서 승무를 보고 시상을 얻었다는 승무(僧舞) 일부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낙화>로서 강한 선비의 애틋한 맘을 잘 엿볼 수 있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곳 남인의 본향에서는 퇴계를 빼고는 아무것도 논할 수가 없다. 낙동강 서쪽에 그의 직제자인 류성룡과 김학봉이라는 우뚝 솟은 인물을 낳았다면, 낙동강 동쪽 이곳도 모두 퇴계의 제자로서 나라가 쓰러지고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의병으로서 총칼을 잡았고 펜으로서 강한 정신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현대시가 김소월과 윤동주, 박목월, 김영랑의 서정성으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면, 이곳은 주지적 시인 이육사와 조지훈을 낳아 그 맥을 다시 이웃 고을 두들마을로 전해 이문열이라는 소설가와 그 아래 마을 청송 진보에 객주 김주영을 탄생하니, 가히 이 산골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송곳'이 되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지조를 지키며 시류에 편승하기를 거부했는가?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선가? 지식인으로 지켜야 할 것이 그것밖에 없는 한스러움 때문인가? 여전히 아리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