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청산리전투 중에 말없이 사라진 홍범도부대...이범석의 생전 증언
진보 일색 민족주의 사학 진영에서는 이범석의 이러한 책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
강호논객 한정석
철기 이범석은 일제강점기에 청산리전투 참전,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인물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편집자 주)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에 대해 그의 회고록 '우등불'(1971년)의 <민족의 긍지인 역사적 사실을 흐릴 수 없다: p86-92>라는 챕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8일 밤 작전회의를 열고 김좌진 장군을 총지휘로, 홍범도, 최명록 두 분을 부사령관으로, 여행 단장이었던 내가 전적 총지휘, 즉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다. 또한 홍범도 부대가 터시고우 방면, 의군부가 무산ㆍ간도 방면의 버들고개, 군정서 군대는 중앙의 송림평을 각각 각전지역으로 정했다.
그런데 9일 날 새벽에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모두들 떠나가 버렸고, 다만 한민단 1개 중대만 남아 있었다. 3개 단체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밤의 장막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중략)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서와 임무 배당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만도 있었겠지만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한 게 확실하다.
홍범도 부대가 이탈한 지 3일째 되는 날, 일군(日軍)에게 포위당해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추운 밤에 우등불(모닥불) 하나 올리지 못한 채, 굶고 떨면서 운명을 체념하고 그대로 그것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천수평의 적이 우리에게 기습을 당해 포위망이 터진 것이다, 도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응당 거기서 책응하여 적을 협격했으면 전과가 더욱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살길을 터준 줄만 알고 그 격전 틈에서 홍범도 부대는 계속 안도현 쪽으로 궤주하고 말았다. 안도현 입구인 우도양창 계곡을 빠져들어가다가 그곳을 경계하던 일군 포위망에 다시 걸렸다. 적은 끈덕지게 추격했다. 이를 모르고 며칠 동안을 굶고 떨다가 이제는 전장을 떠났으려니 안심한 그네들은, 이날 밤 화광(火光)이 충천하게 우등불을 지펴 몸을 녹이며 먹을 것을 끓이는데 추격하던 일군이 모든 자동화기 포를 퍼부었다,
삽시간에 백 수십 명이 아무 저항도 못한 채 떼죽임을 당했다. 또한 무기의 태반을 잃어버렸다, 나머지 무기를 가지고 내도산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일군이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으로부터 노획했다는 사진의 무기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국민회 군대는 흩어지고 얼마의 무기를 땅에 파묻기도 했는데, 지방민의 밀고로 일군이 파낸 것도 적지 않았다. 옛날 의병 출신인 늙은 동지들로 편성된 부대를 영솔하던 홍범도 씨는 의의에 큰 타격을 입고 깨달은 바 커서 나머지 무기를 지청천 장군이 영도하는 신흥사관 생도에게 넘겨주어 장비케 함으로써 지청천 장군의 부대가 비로소 무장하게 되었다, 항간에 흔히 눈에 띄는, 지 장군이 청산리 전역에 직접 관여한 것처럼 기록된 것은 완전한 와전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위의 내용에서 보면 이범석은
첫째, 청산리전투 직전에 김좌진 장군을 총지휘로, 홍범도와 최명록을 부사령관으로 하고 자신을 전투사령관으로 하여 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부서와 임무의 배당에 불만이 있던 홍범도와 최명록 부대 등이 한민단 1개 중대만 남기고 사라졌으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은 5만이 넘는 일본군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戰意)를 상실한 것이 확실하다고 하다고 하였다.
둘째, 홍범도 부대는 이탈한 지 3일째 되던 날 일본군의 포위망에 걸렸는데 일본군에 대한 이범석 부대의 공격으로 퇴로가 열리자 안도현 쪽으로 궤주(潰走)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후 홍범도부대는 안도현의 입구인 우도양창 계곡에서 2번째로 일본군의 포위망에 걸려 수백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무기의 태반을 빼앗겼는데 일본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노획했다고 하는 무기는 이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큰 타격을 입은 홍범도는 깨달은 바가 커서 나머지 무기를 지청천 장군의 신흥사관 생도에게 넘겨주었으며, 지청천 장군의 부대는 이때 비로서 무장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항간에 지청천 장군이 청산리 전역(戰域)에 직접 관여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완전한 와전임을 밝혀둔다고 하였다.
진보 일색 민족주의 사학 진영에서는 이범석의 이러한 책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왜 믿을 수 없다는 것일까? 당연히도 홍범도가 그들과 코드가 맞는 공산주의고 이범석은 이승만 정부에 협력한 ‘우파 반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뭐 있을까. 김좌진과 이범석은 홍범도의 이러한 성향을 알았기에 자유시(1921년)에서 철군했을 것이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도 최진동과 단합을 못 해서 사이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