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와 인디언을 결합한 ‘일베 용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전라디언’은 단순한 멸칭을 넘어 쌍욕에 가까운 모욕감을 준다.

호남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만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실 보수언론의 댓글에서나 볼 수 있는

저질스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훈천 커피루덴스 대표

얼마 전 출간된 ‘전라디언의 굴레’(조귀동 저)라는 책을 읽었다. 닭똥 냄새로 시작한 이 책은 제목부터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한다.

전라도와 인디언을 결합한 ‘일베 용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전라디언’은 단순한 멸칭을 넘어 쌍욕에 가까운 모욕감을 준다. 시커먼 바탕에 ‘반도의 흑인’ ‘꼬리칸’ ‘부패와 무능의 도시’라고 큼직큼직하게 새겨놓은 제목들 앞에서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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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만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실 보수언론의 댓글에서나 볼 수 있는 저질스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울로 대학 간 자식들의 출셋길을 망치지 않기 위해 본적을 옮길 방법은 없는지 진지하게 의논하는 모습을 들어보긴 했다. 군대에 다녀온 형들이 ‘전라도 깽깽이’라며 천대받았다는 울분을 들으며 군 생활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쭉쭉 뻗은 경상도 가는 고속도로와 꼬불꼬불한 전라도 가는 고속도로를 보며 천대받는 자의 설움에 공감했다.

어려서 일찍 서울로 돈 벌러 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불과 몇 달 만에 전라도 사투리를 싹 고치고 ‘깍쟁이 서울’ 말투로 바뀌어 오는 게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조차 전라도 어투는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경상도 말투는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서 씁쓸해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이런 케케묵은 차별의 기억들을 일깨운다. 1970~80년대, 잘 봐줘도 2000년대 이전의 낡은 문제를 2021년의 오늘에 꺼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불쾌한 기분으로 찬찬히 읽어 내렸다. 막연히 알고 있었고 감정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호남에 대한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을 반박할 수 없는 통계와 사례로 증명하고 있었다. 어느새 책머리에서 느꼈던 ‘전라디언’에 대한 모욕감이 ‘호남 문제는 인종 문제’라는 저자의 가설에 대한 동의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올해 ‘5.18 처벌법’의 도입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극우 일베 카페 사장’으로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영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 5.18의 진실을 말할 때마다 ‘유언비어’로 처벌하던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투쟁하여 이룩한 민주정부가 그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법을 그것도 5.18의 이름으로 개정한다는 것이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홀로코스트 처벌법’을 예로 들지만 홀로코스트 처벌법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것으로, 역사부정을 막자는 취지가 아니라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을 처벌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5.18을 소재로 한 호남혐오와 차별의 실상이 ‘인종차별’에 버금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상이 이렇다고 하면 5.18을 부정함으로써 호남혐오와 지역차별을 자행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다. 역사왜곡이 아니라 호남혐오, 인종차별을 처벌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5.18 특별법’의 재개정에 찬성한다는 의미이다.

불균등 발전의 희생양으로서 산업화 열차의 꼬리 칸이 되어 차별과 모멸, 국가 폭력에 의한 집단 희생양이 된 호남의 실태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 어두운 역사는 지역패권 정당의 일당 지배아래 부패와 무능의 도시라는 유산을 남겼다. 운림 54번 버스를 덮친 최근의 학동참사는 지역의 부패를 보여주는 것이며, 매년 5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아시아문화전당의 실패는 호남의 무능을 드러낸다.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경쟁이 사라진 지역정치 구조와 거버넌스의 개혁이다. 견제받지도, 도전받지도 않는 안락한 지위의 ‘지역패권 정당’의 일당 지배를 끝내고 지역정치에서 ‘견제와 균형’을 북돋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내가 추구하는 바와 일치한다. 저자는 고맙게도 이런 지방지배체제에 균열이 가고 있는 특이한 사건으로 내가 대표로 있는 ‘광주시민회의’를 예로 든다.

둘째로는 자생적인 발전 역량을 갖추자고 한다. 정치 권력의 시혜성 사업에 휘둘리지 않고 중앙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의 경제권역으로서의 경쟁력을 키우자고 제안한다.

이제까지 호남차별의 극복을 위한 호남인의 노력은 정치적인 결집에 의지해 왔다. DJ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호남의 한(恨)을 풀고자 했고, 중앙정치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는 영남 출신 대통령에 대한 전략적인 선택과 압도적인 지지로 표출되었다. 그 결과, 5.18정신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담기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정부의 지역발전 예산에서도 충분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호남의 정치적 결집이 만들어낸 지역 정치의 일당독점은 이제 호남의 자생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전라디언’의 굴레를 덧씌우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나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만민토론회에 나가 ‘광주지역 소상공인로서 바라본 문재인 정권의 경제정책’이란 발표를 통해 현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는데, 이것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화들이 격려성이냐 비난성이냐를 떠나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것이다. 격려하는 측에선 그 ‘용기’가 대단하다는 것이고, 비난하는 측에선 ‘정체’가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가히 ‘인종주의’라 할 만큼 호남에 대한 ‘편견’이 깊고 넓게 퍼져있음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호남은 이제 ‘인종주의적 차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외부에 있지 않다. 나부터 ‘전라디언’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검은 것을 검다고 하고 흰 것을 희다고 하면 된다.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다.

왜 전라도에만 대형 복합쇼핑몰이 없는 것이냐는 물음에 호응하는 절대다수의 시민들을 본다. 패권주의 정당에 의한 지역 정치 일당독점의 폐해를 알리고 작은 것에서부터 그 대안을 마련해가는 것으로 ‘전라디언’의 굴레를 벗겨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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