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박영선과 김영춘 후보는

‘문재인’이라는 단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고

문 정부가 해온 정책들을 뒤집는 발언도 서슴지 않아...

 

정치부기자로 근무하던 20031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매운 추운 겨울날이었다. 타사 기자들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의 핵심 측근과 골프를 치게 됐다.

바로 직전에 치러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 여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공이 잘 맞아 기분이 좋았는지, 대선 승리로 긴장이 풀어졌는지 이 분이 정권 비사(秘史)를 털어놓았다.

대선 1년쯤 전에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과 나눴다는 대화다. 하도 재미있게 들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들었던 내용을 직접화법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여보게, 선거가 내년인데 후계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대통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사실은 김중권(DJ 정부 첫 비서실장)을 시키고 싶은데‥‥. 영호남 화합이라는 취지에도 맞고 말이여. 그런데 지지도가 저렇게 안 뜨니 어쩌겠는가.”

한화갑 의원도 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지금 제 정신이여. 내가 호남인데 또 호남 사람이 대통령 하겠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 말이여.”

이인제는 어떻습니까. 지금 지지도도 제일 높은데요.”

“(주저하면서) 그 사람은 되고나면 제일 먼저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할 텐데?”

그럼 노무현은 어떻습니까. 3당 합당 때 우리 쪽에 합류했고,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재벌들 다 때려잡겠다고 할 것 같아서 말이여‥‥.”

이 핵심 측근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노무현이 어떻게 후보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정권 말기가 되면 대통령들은 너나없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철저히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DJ는 수많은 고민 끝에 노무현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국민들 모르게 북한에 달러를 송금한 치명적 약점이 있었던 DJ로서는 만약 이인제가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을 게 뻔하다. 하지만 노무현도 대통령이 되고 나자 대북송금 특검을 했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DJ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정치의 세계는 그렇게 비정하고 냉혹하다.

내가 이렇게 거의 20년 전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는 야당이 압도적이라고 나오지만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투표가 끝나봐야 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이 선거가 끝나고 나면 문재인 대통령은 불면의 밤이 잦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불과 1년 전 4·15 총선 때 거의 모든 민주당 후보들의 입에서는 문재인이라는 단어가 끊이지 않았다. 다들 문 대통령을 지켜줄 나를 뽑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박영선과 김영춘은 문재인이라는 단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해왔던 정책들을 뒤집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문 대통령의 지지도가 30%대로 폭락하고 있는 마당이니 그걸 욕할 수도 없다.

집권 이후 지금까지 역대 최고의 지지율로 고공행진을 했던 문 대통령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할 지도 모른다. “나는 옛날과 똑 같은데 정책 몇 개 실패했다고 왜 그러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높은 지지가 정권이 뭘 잘해서가 아니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어주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싶었던 국민적 염원이 숫자로 표현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문 대통령은 이해하고 있을까.

이제 는 끝났고 대통령을 포함한 이 정권 귀족진보들의 무능과 위선과 뻔뻔스러움에 대해 국민들이 신물을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까.

높이 올라갔을수록 떨어지면 더 아프고 부상도 치명적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식하게 됐을까.

보궐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일 지금까지의 여론조사대로 서울과 부산 모두에서 두 자리 숫자, 그러니까 10% 포인트 이상의 격차로 민주당이 패배하게 된다면 청와대는 정치적 쓰나미를 맞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과거에 축적된 경험들이 쌓여있다.

우선 눈치 빠른 공무원들이 일제히 등을 돌린다. 그와 함께 정권이 저질렀던 무리수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미 원전 폐쇄, 옵티머스와 라임의 천문학적 사기극, 울산시장 선거부정 의혹, 김학의 사건 무리수, 버닝썬 사건 덮어버리기, 정치검사·판사들과 권력의 유착 의혹 등 실체가 드러나면 나라가 뒤집힐 일들이 수두룩하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면 당의 내분이 시작된다. 그동안 대통령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아부하던 의원들이 등을 돌리고 차기 대선 후보에 대한 줄서기가 시작된다. 청와대 참모들도 제 살기 바빠서 누가 차기 후보가 되느냐만 살핀다. 청와대 정보도 줄줄 새 나간다.

그뿐 아니다. 어용 언론들도 이쯤 되면 살 길을 찾아 나선다. 일방적인 정권 옹호에서 벗어나 비판을 시작하고, 보도에서도 최소한의 여야 균형을 맞추기 시작한다.

과거의 경험을 참고하면 대개 이 단계에 이르면 청와대와 관련한 큰 문제가 한 두 개쯤 터져 나온다. 대통령 가족이거나 친인척, 아니면 핵심 측근의 비리인 경우가 많다. 여론은 분노하고 대통령 지지도는 더 떨어진다. 여당의 차기 후보는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작한다. 탈당을 요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이런 순서로 임기 말이 진행돼 왔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면 문재인 대통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대가 컸던 대통령에게 배반당하면 그에 대한 분노도 그만큼 커진다.

위대한 문민시대를 내세웠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초반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IMF 사태 이후 그야말로 바닥 아래까지 내려갔다. YS는 그나마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등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는데도 그랬다. 이렇다 할 업적을 이룬 게 없는 문 대통령은 촛불정부라는 환상이 사라질 경우 어떻게 될까. 기대를 배신당한 국민들은 YS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

야당으로부터 이 정권의 상왕(上王)이라는 비난까지 듣는 이해찬은 여당이 보궐선거에서 지면 대선에서 힘들어 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훨씬 순탄하게 갈 수 있는 걸 약간의 장애물이 생긴다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비포장도로로 간다고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웃기는 소리다. 아마도 자기편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발언이겠지만 비포장도로에서는 타이어가 펑크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래저래 대깨문들로부터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문 대통령의 불면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조국이나 김경수 같은 친문 직계가 아닌 이상 누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돼도, 심지어 정권재창출에 성공해도 문 대통령은 퇴임 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게 권력의 생리다.

그런데 만일 서울과 부산에서 전패하고, 민주당이 분열을 시작하고, ‘() 문재인러시가 벌어지고, 5년 만에 다시 정권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나 같아도 분명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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